노인과 바다 독후감
줄거리
멕시코 만에서 고기잡이하는
산티아고라는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은 84일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85일째 되는 날
먼 바다로 나가게 되었고
어마어마한 대어를 낚게 된다.
무려 사흘밤낮을 그 청새치와
씨름한 끝에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작은 배보다도
큰 청새치를 배에 싣고 갈 순 없었고
배에 묶어서 매단체로 천천히
내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달겨 들었고
노인은 다시 한 번 상어들과의
사투를 벌이게 된다.
결국 상어들을 전부 퇴치하긴 했다만
자신이 잡은 청새치는 볼품없게
뼈만 앙상하게 남고 말았다.
노인은 그렇게 돌아와 늘어지게 잘 수 있었고
사자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내 생각
읽기 전엔 뭔가 노인과 바다의
낭만적인 스토리이려나 했는데,
이 노인은 매우 마초적이면서도
불굴의 사나이로 나오고 있다.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일는지
아니면 이런 사람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을는지 싶었다.
읽어가며 자연스레 드는 생각은
우선 낚시를 모르는 내가
마치 낚시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과
사흘밤낮 동안 나도 짠 내를 맡으며
바다위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줄 하나로 이어진 목표물.
내 의지보다는
먹잇감의 의지를 생각한 사투.
상상과 조율을 통해 이뤄지는
사흘간의 낚시는 잔잔한 바다와 같이
차분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상어가 덤벼
청새치가 뜯겨 나갈 때는
마치 내 살이 뜯기는 듯 했다.
망할 놈의 상어.
아까운 내 청새치. 내 명예.
그만큼 노인의 낚시가
저절로 체감될 수 있을 정도의
길고 상세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런 게 노인과 바다의 이야기였구나.
내가 왜 이렇게 경험해보지도 않았던
낚시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글인 것 같은데 정말 그랬을까.
나중에 찾아보니 20세기에는
행동주의 문학이란 것이 있었다하고
미국에선 헤밍웨이가 손꼽힌다고 한다.
즉 무언가를 직접 경험하고
소설로 형상화 하는
작업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가 즐겼다는
스포츠인 사냥, 낚시, 권투 등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그런 류의 것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헤밍웨이는 건강하고
거침없는 미국 남성상의 상징이 된 것이다.
중간에 보면 힘들게 청새치와 싸우는 중에
노인은 바다 거북이를 생각한다.
바다거북이는 사람들에게
껍질이 다 벗겨지고 살을 발라낼 때 까지도
심장만큼은 살아있을 때만큼
크게 뛴다고 한다.
이는 나이가 들어
여기저기 주름지고 약해보여도
노인의 눈빛만큼은
빛나고 있었다는 내용과 맞물려
외부적인 요인과는 상관없이
그의 의지가 타오르고 있음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젊었어도 심장이 힘차게 뛰지 않고
눈빛이 죽은 채로 보내온
세월들이 떠오르면서
총명한 노인의 눈빛을 상상하게 되었고
겉모습과는 달리 힘차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을 상상하며 보게 되었다.
숫자인 나이 혹은
근육의 크기로만 가늠하는 것이 아닌,
나 아직 죽지 않았다며 겉으로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닌,
열정과 의지와 도전과
불굴로 대변할 수 있는
강인함이라는 점에서 미국인들에게
매력 포인트를 얻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생각 2
이 책의 가장 유명한 문구가 이렇다.
‘파멸은 당해도 패배할 수는 없다.’
어찌됐든 간에 노인은
85일 만에 결실을 보았다.
그간 잡았던 것들 중에 가장 큰 것이었고
혼자의 힘으로 잡았다.
성취는 봤는데 돌아오는 길에
이 결과물을 갉아먹는 상어들이 달려든다.
그렇게 다 뜯기고 남은 게
노인의 결과물이다.
노인은 말한다.
‘차라리 안 잡았으면 좋았을 걸’
이것은 자신의 결실이
뜯겨가며 생긴 회한이고
잡아온 과정까지도
후회하게 되는 패배감이다.
청새치와 대화하는 장면이 길게 나오는데
이런 걸 보면 노인에게 청새치는
그냥 사냥감이 아닌 듯하다.
애착이 있다.
줄 하나를 놓고 몇날며칠을
씨름하며 생긴 애착이다
온전히 자신의 노하우와
힘과 인내로 따낸 결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실이라도
온전히 다 가져가기가 쉽지 않았다.
상어라는 적과 싸워야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이나 과정과는
별개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결과물이
초라하게 나왔을 때 느끼는 패배감이
결국 그 과정에서의 즐거움까지도
무색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꼭 낚시가 아니라 요즘 시대의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다.
정말 열심히 회사에 충성하고 다녔는데
구조조정 당한다든가 임금체불 당한다든가
이러면 다들 미치고 팔짝 뛸 일 아닌가.
그러니 이런 상황에선 차라리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뭐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파멸은 뭐고
패배는 또 파멸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엔 문장에서처럼 파멸은
타의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상어에 의해 청새치가 뜯기듯이.
하지만 패배는 노인의 회한과 회의감
혹은 포기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과는 상관없이
스스로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위축되고 굴을 파고 들어가는
패배주의이다.
나는 더 이상 안 되는구나.
이것 밖에 안 되는구나.
더욱이 노인이 되어갈수록
더욱더 그러기 쉽다.
실존적으로 생각하면 노인이라는 것은
한계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의지와 투지가 넘쳐도
지나치게 바다 멀리 나와서
지나치게 큰 고기를 잡으면
나머진 상어에게 뜯기고
이렇게 딱 자신의
능력만큼만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니 투지와 의지와
인내와 높은 목표만 가지고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게 노인이 되어가는 어부를 통해 나타난다.
얻을 수 있는 것과
얻을 수 없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후회와 회한은
그런 의미에서 나타난 것 같고
노인의 입에서
소년이 보조로 있었으면 하는 말이
자꾸 나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일 것이다.
노인은 바다를 스페인어의 여성형으로
라마르(la mar)라고 표현했다.
바다는 낭만적이고
은혜를 베풀어주기도 하지만
때론 빼앗아 가기도하는 그런 냉정하고
살벌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노인과 젊은이들의
대비되는 점이라고 봐도 좋다.
보통의 젊은이들은 바다를
남성형 엘마르(el mar)로 쓰게 마련이다.
싸워야하고 정복해야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바다를 바라보는 관점이
라마르였던 것이 아니고
젊었을 때는 그렇게 바라보다가
나이가 든 산티아고는 어느덧
바다를 여성형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게 더 이상 바다는
싸우고 정복해야 할 곳이 아니다.
바다가 주는 은혜가 있으면 받고 때로는
빼앗기기도 하는 있는 그대로의 바다의
순리를 보는 순해진 노인의 모습이다.
내생각 3
어쨌든 이런 상황에도
노인은 상어들과 계속 싸운다.
내가 잡은 물고기를 그렇게
쉽게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어차피 내주는 것은 똑같은데 그냥 내주는 것과
쉽게 내주지 않는 것은 그래서 차이가 크다.
노인은 결실을 상어 떼들에게 파멸 당했다.
하지만 스스로는 패배하지 않았다.
이게 결과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만약 파멸당하고 패배까지 했다면
다음날 노인은
다시 바다에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패배주의는 그렇게 다음을 무너뜨린다.
루저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누군가 루저라고 손가락질하면
루저가 되는 것일까.
그건 스스로가 루저라고 인정하는 순간이다.
결실이 무엇이 나왔든
그 다음을 하게 할 수 있는 힘.
그것이 파멸은 당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사람의 힘일 것이다.
파멸 당하고 와서도 사자 꿈을 꾸는 노인.
찾아보면 사자는
사냥 확률이 30퍼센트로
썩 높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사자 꿈을 꾼다는 것은
자신이 그런 사자와 같이 쫄지 않고
7전8기의 사람이 되길 원한다는 것이다.
비록 뼈만 앙상한 청새치를 가져왔더라도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다음을 노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사자 꿈에 대한 나와 다른
해석으로 이런 것도 있다.
노인이 홀로 바다에 나와 낚시를 했고,
중간중간에 계속 소년이 있었으면 하는
말을 했던 것으로 보아
무리지어 다니는 사자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다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던 팔팔했던
젊은 시절엔 소년이 없어도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낚시였다면
이제 노인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처지임에 분명하다.
이것을 두고 노인이 나이가 들어서
의존적이 됐으니 나약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식의 해석을 하기보다는
그만큼 이제는 싸우고
쟁취하고 하는 그런 삶 보다는
다 같이 어울려서 도와가며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바람 아니었나 생각한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나 삶을 대하는 태도가
투쟁이어야 하나 화합이어야 하나.
그래야 하는 나이가 따로 있는 것일까.
대모의 상징도 대학생들이었고,
혁명의 상징도 젊은이들이다.
현실적으로 젊을수록 투쟁하기 좋고
정복하기 좋긴 하다만
여기 나오는 산티아고처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스스로 위축 되는 것은
더욱 자신을 루저로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투쟁은 젊은이들에게 맞기고 좀 물러날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기운 달리니
몸은 물러나 있을 수는 있어도
거북이의 심장처럼 심장은
항상 뛰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혁명을 이끌던 젊은 세대들이
왜 중년이나 노인이 되어서는
그때의 그 정신이 사라지고
기성세대들과 비슷하게 변해가는가.
그건 세월에 의한 파멸과 함께
정신이 패배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산티아고는 그런 면에서
정신이 패배하지 않은 불굴의 사나이 이다.
내 생각 4
청새치를 낚시 줄 끝에 달고 사흘.
망망대해에서 이는 분명
청새치와의 싸움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정면에 서있는
두려움과의 싸움이기도하다.
읽다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청새치를 풀어주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기회를 노리지
저러다 죽을 수도 있을 텐데 왜 그런 것일까.
내 생각엔 노인이 이번 아니면 다시는
이 같은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잔뜩 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 기회가 지나가면
다시 84일이 지나야 또 오는
그런 기회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영영 만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정도 낚시 경력의 노인이면
그 정도는 통찰 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기회를 놓치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싫은 게
노인의 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피하지 않고
기회를 잡았기에
패배감은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뼈다귀 밖에 안남은 청새치는?
그건 시각적으로 보이는 결과물일 뿐이다.
노인의 눈에만 보이는 결실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그러니 노인이 돌아와서 사자 꿈을 꾸는 것은
존재의 전변이고 다음이 보인다는 것이다.
중도에 그냥 풀어주고 돌아왔었다면
그 이전의 노인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패배자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회란 오기도 쉽지 않지만
기회가 왔을 때 잡는 사람과
잡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그렇게 확연히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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