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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독후감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독후감 1

by 생각하는 남자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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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독후감 1

 

줄거리

 

1

 

주인공 이름은 한스. 

아버지와 동네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한스.

당시 가난한 마을의 학생이 성공하는

유일한 길은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는 일 이었다고 한다.

 

한스는 그 동네에서는 나오기 힘든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서

온갖 압박에 시달려가면서도 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합격한 끝에 찾아온 방학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2

 

즐거운 방학이 시작되었다.

마을 목사의 권유로 신학교에 갈 것에 대비해

사전공부에 전념하는 한스.

 

낚시나 그 밖의 유희도 잠시였고

다시금 학업에 대한 성취나 우월감에

그의 방학도 점점 공부하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이제 방학이 끝났고 그 마을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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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1

 

우리나라의 많은 학생들도 그러듯

주변의 많은 기대감 속에 압박감을 느끼며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런데 합격 한 이후 한스의 심경변화가 눈에 띈다.

 

자신보다 낮은 급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매우 우습게도 여기고,

그 우월감을 즐겼으며

자존감이 팍팍 살아나 어깨에 힘도 들어간다.

 

워낙 힘들고 고된 공부였을 태니

인간적으로 좀 으쓱하기도 하고

자랑도 하고 싶은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스가 방학 한 이후에

그토록 즐기고 싶던 낚시도 뒤로하고

공부에 일로매진 하는 그 모습이

무서워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면 이제 공부의 목적이

우월감이 되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른들의 권유로 시작했던 공부가

한번 성공을 거둔 이후에 받게 되는 피드백이

그들의 찬사이니 이제 그 우월감의 맛을 보게 된 것이다.

 

합격하고 나면 마음 후련히 낚시도 즐기고

해방된 기분 속에서 자신이 하고픈 거를

자유롭게 하고자 했지만 최고가 되겠다는

그 야망은 더 이상 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이것만 합격하면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이제는 스스로가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일까.

 

처음 공부의 동기가 아버지의

타인에 대한 질투심에 못이긴 압박.

 

압박감 속에서도 재능과 노력의 결실로 맺어진 합격.

그것에 대한 주변의 동경과 찬사.

 

자의가 아닌 타의로 시작했고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몰랐지만

그 의미를 이미 주변에서 어른들이 쥐어주고 있다.

'너 그렇게 하는 게 잘하는 거야'

 

뭔가 대단한 걸 이루기 위해선 압박감도 있을 수 있고

꼭 자의적으로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시대와 그 사회적인 조건에

부합하게 따라야 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성취를 이뤄야하는

이유와 의미에 대한 자각은 스스로 이루거나

도움을 받아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신학교에 가는 이유와 의미는

한스 스스로 생각 할 시간도 필요하고

그렇지 않다면 성숙한 어른들이 알려줄 필요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목사님이나 교장선생님 그리고 아버지.

 

그들은 모두 합격의 의미를 우월감에 두고 있다.

그러니 한스야말로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좋은 대학에 가든 취직을 하든 그 무엇을 이루든,

그 목적이 그저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서

그들을 아우르고 어깨에 힘주고

살기 위함이라는 식의 교육이 노골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알게 모르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입시경쟁, 취직경쟁, 결혼 경쟁.

어쩌면 인간이 태어나 경쟁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본능일 수 있겠다.

 

하지만 본능에만 충실하여

본능대로 사는 것만을 가치로 여기는 것이 문제다.

 

경쟁은 분명 동기를 유발하는 좋은 측면이 있는 것이지만

시기, 질투, 미움, 우월감과 같은 마음을 불러온다면

경쟁이 적정선을 넘어섰구나 싶은 생각을 해야 한다.

  

내 생각 2

 

한스가 시험을 보기 위한 과정과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는 책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유독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당시의 상황 상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스의 잘못이라기 보단

그런 외길인생을 만들어 줄 수밖에 없었던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한스야 합격을 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지만

결과론적으로 합격 못했다면

또 얼마나 좌절했을까.

 

그리고 그 합격의 결과가

내가 원하지 않는 길이면 어쩌나.

 

한스가 원하는 것은 자연 속에 자연과 함께하고

낚시를 즐기는 그런 성향의 것이라 보인다.

 

그런 아이가 꿈꿔오지도 않던

신학교 시험에 합격했으니 그 아이의 눈에

당장 보이는 것이라곤 우월감 아니겠나.

 

하고 싶은 걸 하게 되었다는 그런 해방감 말고

달리 보여 지는 것들이 없이

오직 우월에 대한 찬사들뿐이니 말이다.

 

기성세대가 후세에게 물려줘야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스의 아버지나 마을사람들처럼 혹은 그 사회처럼

기존의 길을 계속 고수하며 물려주는 것일까.

 

한스의 상황을 보면 행복이라는 것의 스펙트럼이 매우 좁다.

재능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는 신학교 아니면

그냥 시골마을의 대장장이로 사는 것이 전부이다.

머리 나쁜 사람, 그리고 체력이 약한 사람은

대체 어디에 서있어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요즘은 예전에 비해선 젊은이들이 택할 수 있는

진로의 방향이 비교적 다양해졌다고는 할 수 있지만

좀 더 폭넓은 진로를 제시할 수 있고

다양화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 기성세대들이

후세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내 생각 3

 

예수를 믿지 못하는 목사님의 모습이 나온다.

사람들을 설교하고 전법하기 보단

역사적 예수를 찾아 비판하기에 열성이다.

 

구둣방 아저씨는 목사를 조심하라했지만

왠지 한스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아저씨를 편협하게 보았고

목사를 만나 학식을 배우면서는

자신이 참된 연구의 세계에 들어간 듯하여

구둣방 아저씨의 충고는 이미 잊게 되었다.

 

여기에서 눈이 가는 구절이 나온다.

과학은 늘 정당성을 인정받아왔고 불평등한 투쟁이었다.

이것은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평과 창조 학문과 예술.

그러나 예술은 늘 풍요로운 토양을

로이 발견하여 온 것이다.

이것은 삶이 죽음보다 강하고

믿음이 의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맥락상 보면 구둣방 아저씨는 창조와 예술 쪽에 해당하고,

목사는 비평과 학문 쪽에 해당하는 것 같다.

 

왜 예술을 풍요로움의 토양이라 했을까.

내가 느끼기에 과학적 해석으론

죽음을 말하긴 쉽지만 삶을 논하긴 너무 메마르다.

 

온갖 과학적 근거로 의심이란 걸 하긴 쉽지만

이 또한 너무 메말라서

믿음과 사랑을 말할 수는 없다.

 

메마른 땅에 믿음이나 사랑의 비가 내려

풍요로운 땅이 되듯 예술과 과학은

그렇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삶이 항상 과학적이지도 항상 예술적이지도 못하지만

풍요로운 삶을 이루는 것에는

예술이나 믿음 사랑과 같은 것들은 필수이다.

 

내 생각 4

 

한스는 목사에게 학업을 배울수록

더욱더 성취감이 고양되어갔다.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은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학업이라는 것이 존경스러워졌다.

 

자신이 공부하지 않았다면

난폭한 개혁가나 쓸 때 없는 생각만 하는

몽상가가 됐을 것이라면서

다른 사람들 역시도 가르쳐서 다 뜯어고쳐야한다고 한다.

 

이런 한스는 스스로를 성숙했다 생각하고

교수님도 그런 한스를 성숙하다 한다.

한스의 아버지도 그가 자랑스럽다.

 

한스 외의 나머지 사람들을 성숙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모두 자신처럼 배워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한다.

 

위에 썼듯이 한스는 이런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 이러하니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성숙한 인간이 이럴 수밖에 없다.

 

종합해보면 성숙하다는 것은

학식이 넓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풍부해진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선과 악, 과학과 예술, 이성과 감성

이러한 세계를 아우르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학습은 편협함으로 가는 길이고

성숙과는 더욱 멀어지는 길이다.

 

수학을 공부하던 중 한스의 말이 인상적이다.

‘수학은 정답을 배우더라도

그 이상의 의미는 생겨나지 않았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곧게 뻗은 국도와 같다.

보다 넓은 세계를 조망해 볼 수는 없었다.’

 

나도 학창시절 수학을 좋아했고 실제 성적도 좋았다.

정해진 공식만 대입하면 됐고 답이 명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 이상은 없다.

 

공식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것의 한계는

바로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는 삭막함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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