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독후감 2
줄거리
3장
신학교 생활을 시작한 한스.
하일너라는 친구와 가까워지게 된다.
한스가 모범생인데 반해서
하일너는 방탕한 시인 기질이 있다.
한스는 그가 공부에 방해가 되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의 시나 말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 하일너가 학교에서
사고를 쳐 금고형을 받게 되고
한스 자신은 그를 애써 모른척하며
다시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4장
힌딩어라고 하는 친구중 하나가 사고로 죽게 되었다.
이 일은 다른 친구들에겐
금세 잊혀 졌지만 한스에겐 충격이었다.
자신이 명성을 위해 하일너를 모른척했던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이다.
결국 한스는 하일너를 찾아가 사과를 하였고
둘은 그 후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둘만의 시간을 보냈고 한스의 성적은 계속 떨어져갔다.
그 후 교장선생님의 권고에도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 한스는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난다.
의사가 산책을 권유했고
한스 홀로 산책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반항으로
하일너는 산속으로 며칠 도피하며 지내다 결국 잡혀왔다.
그는 이번엔 퇴학처분을 받았고 한스는 그 후 혼자남아
점점 선생님들이나 친구들 눈 밖에 나게 된다.
내 생각
한스는 친구가 없었지만 하일너가 좋은 눈치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1등을 하든 2등을 하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니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무서워서 하는 거겠지’
하일너가 한스에게 했던 말이다.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선택하여 행하기보다는
주어진 것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일너의 행태가 지나치게 방탕하고
제멋대로고 불량하고를 떠나서
한스 선택의 갈등이 눈에 띄는 것이다.
기왕이면 학교에서 놀다가 사회에 나가서
실패자로 사느니 1등하는 게 좋은 거고
기왕이면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면서
착한 학생으로 지내는 게 좋을 태지만
그건 그걸 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의 얘기인 것이고
한스의 갈등을 따라가 보면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자기 자신도 정말 그걸 원하는 것인지 모르게 여기까지 왔지만
하일너가 보기엔 그저 어른들이 두려워서 혹은
사회에서 낙오되는 것이 두려워서 택해온 것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한스는 촉촉한 마음과
영적인 대화를 원하는 듯 했다.
그는 성적이 떨어졌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적대신 하일너를 택한 삶이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확신이었다고 본다.
흔히 인생에서 성공이라고 하는
출세가 해결 해 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 무미건조함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무미건조했다는 것을
힌딩어라는 친구의 죽음을 통해 알았고
그 목마름을 하일너를 통해 해결했던 한스.
이제 그 메마르고 건조하다 못해
갈라진 논바닥 같은 그 마음이
얼마나 삭막한지 그 무가치함을 아는 것이다.
그 촉촉함을 아는 사람은 이제 다시는
건조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할 줄 알게 되고
더 이상 다른 세간의 가치 있던 것들보다
이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게 된다.
한스가 그걸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책을 통해 예수와 함께한다든가
역사책을 보며 역사적 인물들과 만난다든가하는
그런 일은 이전에 한스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간 메마른 가슴으로 접했던 지식들은
지식의 확장만을 가져왔고
그 지식의 확장에 기뻐하던 한스가
이제는 감성적인 인식의 확장에 즐거워하고 있다.
하일너에겐 대충 공부해도
필요한 지식만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는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이건 메마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능력이고
기성세대의 수레바퀴위에 공부해오던 사람이
갖기 어려운 능력이라 생각한다.
수많은 공부와 학문을 닦은 사람들은 도처에 많은데
왜 지혜롭고 따듯한 사람들은 찾기 힘든걸까.
지식의 확장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비유로 치면 가뭄이 든 논바닥에
계속하여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이 여겨진다.
메마른 땅에 아무리 씨를 뿌린들 그 씨가 자라날리 없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여도 그 사람의 가슴에
영적인 촉촉함이 스며들어있지 않다면
그는 학자 그 이상은 될수가 없다.
친구들 중 루치우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루치우스는 이 난리 통에도
신경 끄고 자신의 공부만 하는 중이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모든 감정선을 끊을 준비가 된 친구이다.
내게 한스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루치우스가 사랑스럽지 못한 이유와 대비된다.
딱딱히 굳어버린 논바닥 같은
가슴으로 두뇌로만 살아가는 사람과
촉촉이 젖어 새싹이 나는 숲과 같은
가슴을 지닌 사람의 차이이다.
내 생각 2
왜 하일너의 퇴학은 힌딩어와는 달리
친구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영웅담처럼 남았을까.
자신의 길을 자신이 택했다는 것에 대한 동경 아닐까.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수레를 굴리는 일 말고
내가 만든 수레를 굴리는 것이다.
교장선생님이 한스에게
수레바퀴에 눌려 죽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한다.
이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체제에
따라가지 못하면 낙오된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지치고 힘든 한스에게
이런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한스의 남은 영혼마저도
청소기로 빨아들이는 작업이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영적인 관계를 가져본 적 있는가.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딱딱한 그런 한스가
영적 관계를 바라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목이 마를 때 물을 찾는 것처럼
그런 어찌 할 수 없는 본능일 수 있다.
이성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의
영적관계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삶.
정해진 수레바퀴 위에 살며
부모와 자식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느껴봄직한 이런 영적 교류는
요즘 같은 시대엔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성장이나 성공이라는 것의 초점을
지성적인 면에만 맞추어 돌아가는
세상 말고 영혼의 성장에도 균형을 맞춰야한다.
영혼 없는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은
마치 AI가 활보하고 다니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또한 지성적인 면만 키워져
삭막한 로봇이 되는 것도 무섭지만
반대로 영적인 면만 키워져
무비판적이고 제멋대로인 사람이 되는 것도 무서운 일이다.
하일너가 방탕한 시인이라면 한스가 모범적인 학자이다.
이 둘은 각자의 문제점이 분명하다.
하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하며 살라는 그런 것도 아니며
시키는 대로만 따라서 살라는 그런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두 친구가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라 생각한다.
물이 넘쳐 홍수가 난 논과 같은 하일너와
비가 안와 가뭄이든 논과 같은 한스의 만남이다.
어릴 때부터 비를 맞지 못하고 자란 한스가
갑작스레 하일너라는 친구의
영적인 비를 너무 많이 맞는 바람에
그 정체성의 혼돈으로 신경쇠약에 걸린 것이라 본다.
어른들의 강하게 내리 쬐는 태양열에
가뭄이 익숙해진 한스가
갑자기 내린 친구와 문학이라는 비에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미 농사짓는 법은 배운 적 없는 그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교장선생님의 계속된
한스와 하일너와의 거리두기는
한스의 머리는 채우지만 그의 심장은 쥐어짜
한 방울의 물도 남기지 않으려는 잔인함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많은 생각을 해야 하지만
그 것이 사회가 만든 수레바퀴가 아니라
내가 만든 수레바퀴가 될 수 있기 위해선
반드시 영적 울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줄거리
5장
신경쇠약 상태로 방학을 맞은 한스.
그나 교장선생님이나 다시는 한스가
신학교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
한스는 상처를 많이 입었고 언제든 죽을 수 있도록
나무 밑에 목매달 곳을 찾아 놓는다.
그리곤 좋았던 어린 시절을
추억할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회상하게 된다.
하지만 그 뿐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 생각
‘단절된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 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책의 나오는 한 구절만 보아도 5장은 그저 슬프고 쓸쓸하다.
미래가 아닌 과거 속에 살고 있는 모습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마음의 상처가 크다.
이것은 단절된 슬픔이다.
어른들은 아이가 크며 이런 저런 상처도 생기고
아파봐야 강하게 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흔한 편견일 수 있다.
깊이 패인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
단절을 의미한다고 본다.
단절되기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서
다시는 연결 될 수 없는 것이다.
한스와 같은 아이들에게 필요한건
어른들의 지성도 훈계도 아닌 자비라고 생각한다.
꿈을 잃어버린 상처, 나를 잃어버린 상처,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상처.
이런 상처들을 한스를 통해 느꼈다.
그리고 그에게 한줄기 자비의 비도 뿌려주지 않는
어른들에 의해 그는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한스는 잘못한 게 없다.
그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수레를
열심히 굴리고자 했던 반항 할 줄 모르는
온순한 성품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리고 그조차도 잘못이라며
꾸짖는 어른들이 잘못되었다.
한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연과 함께하고 친구와 시를 노래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들이 그 길은 잘못 된 길이라고 가르쳐줬다.
한스처럼 온순한 성품의 아이가
어찌 그걸 감당할 수 있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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