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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독후감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독후감 1

by 생각하는 남자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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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독후감 1

 

줄거리

 

해리엇과 데이비드. 

두 사람은 직장 모임에서 만나 결혼한다.

 

큰집에서 많은 아이들을 낳아 키우는 것을

행복이라 생각하였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리해서 집을 구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넷째 아이까지는 보통의 가정처럼

아이를 낳고 키워오며 행복했는데,

다섯째 아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한 달 일찍 태어나서도 몸무게가

유독 많이 나갔으며 힘이 넘치고

괴기스럽게 생기다못해 성격까지 포악하다.

 

결국 이 다섯째 아이로 인해

가정의 행복이 무너졌고,

주변의 압박과 고민 끝에 벤을 요양시설에 보낸다.

 

하지만 양심에 가책을 느낀 해리엇은

결국 벤을 다시 데려왔고 이런 저런 노력을

해 보았지만 벤은 달리 나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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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허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알고 접한 책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전반적으로 느낀 흐름은

희망으로 시작해 공포로 이어지고

결국 절망으로 끝나는 그런 분위기의

스토리였다고 생각한다.

 

아내 해리엇과 남편 데이비드

두 남녀는 일단 공통점이 있다.

 

보수적이고 문란하지 않아

서로를 알아보는 게 있었다.

 

그리고 둘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냥 이렇게 보면 사랑해서 결혼 한 건가

아니면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아 결혼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흔한 멜로드라마에서 보듯 첫눈에 반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는 그런 식의 만남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가정을 꾸리기에

그 이념이 상통하여 결혼을 결정한

그런 케이스라는 것이다.

 

결혼은 현실이라 조건을 본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첫째 아이가 나왔을 때,

이 해리엇이 했던 생각이 나를 조금 갸우뚱 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가지고자 했던 것은 아이가 아니라

행복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째 아이가 생겨서

아이가 사랑스럽고 예뻐서 행복했다는 것 보다는

자신들이 목표로 둔 가정의 모습에

다가가고 있어서 행복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아닌 자신들이 꿈꾸는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근접한 가정

즉 부부와 자식 그리고 집이라고 하는

행복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아이를

여덟 명까지도 낳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의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많이 낳아 키우기 위해

분에 넘치는 집을 구하고,

분에 넘치게 아이를 낳다보니 거지꼴을 못 면하게 생겼다.

 

이건 소유욕이 강한 것이다.

아이를 많이 낳고 적게 낳고가 문제가 아니라

분에 넘치는 일을 벌이는 문제라고 보이는 것이다.

 

아이가 사랑스럽고 좋으니

아이를 많이 낳겠다 하는 것도 아닌

그냥 자신들 이데올로기의 조건을

충족시킬 한 조각으로만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내 눈에 이들의 아이라는 개념은

소유하는 것이고 수집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2년의 공백기를 갖다가 돈이 모이면

첫째 아이를 갖기로 했던 것도 어겼고,

첫째를 출산 하자마자 

3개월 후에 다시 임신 하게 된 것으로

여러 가족들의 공분을 샀던 일을 생각하면

이들이 얼마나 급한지 알 수 있다.

 

즉 확고히 정해진 목표+욕심은

조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왜 조급해 지는 건가.

정해진 목표가 있고 선명한 목표일수록 욕심이 붙는다. 

조급해진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 조건 충족이

원만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행복이라는 허상은 유리가 조각나듯

쉽게 깨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불 보듯 빤하게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그런 뜻일 것이다. 

기초가 약하다.

 

모래위에 지어진 이들의 가정. 

돈이 부족해 집이 사라져도,

아이들 중 하나가 크게 잘못되어도, 

부부중 하나가 잘못되어도,

도와줄 수 있는 양가 부모님중

하나가 잘못되어도 바로 무너질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욕. 

기초를 다지기 전에 지어버리는 집.

그 허점을 꼬집는 것이 아닐까 정리하게 된다.

그리고 기초를 다지는 자세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이

일을 그르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큰가 생각하게 되었다.

 

내 생각 2

 

다섯째 아이 벤은 그냥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문제아 수준이 아니다.

 

알기 쉬운 비유로 그냥 사탄의 인형 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감당하면 되지 않겠냐는

식의 선은 아닌 것이다.

 

실제  이라고 하는 이름의 어원은

약성서에 찾을 수 있다.

 

아이를 갖지 못하던 라헬이

난산을 거듭한 끝에 아이를 낳고 죽었는데,

그 후 그 아이 이름을 히브리어로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벤노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야곱은 오른팔 같은 아이란 뜻의 

벤야민으로 바꿔 불렀다.

 

즉 아버지에겐 가장 큰 기대를 갖는 아들이지만,

어머니에겐 슬픔을 안겨준 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섯째 아이일까 생각해봤다.

내 생각에 그건 첫 번째나 두 번째 아이이면 독자가 봤을 때

분에 넘친다고 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상황 상 다섯째 쯤 되면 분에 넘쳐 보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그만한 집을 구할 능력이 없었기에

남편의 아버지에게 신세를 졌고,

아이들을 혼자 키울 수가 없었기에

친정어머니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으며,

벌이가 빠듯해서 여기저기

계속해서 신세만지고 어렵게 살고 있다.

 

전통적인 가정을 꾸미면

행복해 질것이라는 생각은 나쁜 것이 아니나

현재 자신의 상황은 뒤로하고

이데올로기만큼은 따라가야 한다는 고집은

소유욕 즉 욕망이라는 말이 아니면 뭐라 해야 할까.

 

이걸 여자로서의 모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권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이데올로기를 추구한다는 것은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지만

맹목적인 추구는 자칫 이렇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만들며

주변의 여러 가지를 외면하게 만든다는 걸 보게 된다.

 

이 부부는 아이를 낳아오며 늘 그랬다.

양 부모의 자식으로서의 책임감도 외면했고

형제자매로서의 책임감도 외면했으며

심지어 부모로서의 책임감도 외면하게 된다.

 

그런데 관계들 사이에서의

임감은 도리어 외면하면서도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행복에 대해서는 우월감에 젖어 살았다.

 

자신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근접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벤이 생기고 나서

‘너무 행복하려고 해서 저주 받았다’ 라고

했던 해리엇의 생각은 자기가 생각해도

이건 좀 너무 했나 싶은 것이다.

 

아이 수집에 물불 안 가리고 열을 올리다보니

이제야 자신도 느껴지는 것인데,

이런 걸 보면 행복은 수집하는 개념이 아니구나 생각해보게 된다.

 

이것만 있으면 저것만 있으면 또 이것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진다면

내가 원하는 행복이 이뤄질 것이다.

실제로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아 온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여자가 있었으면, 이제 집이 있었으면, 

돈이 좀 더 있었으면,

집이 좀 더 컸으면, 

이제 다 됐으니 탈이 안 났으면.

 

이렇게 계속해서 이것저것 수집하다보니 남는 건

행복이 아니라 늘어만 가는 뱃골 이었다. 

뱃골만 커져서 이제 잡은 건 더욱 놓기 싫어졌고

더 많은 걸 생각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다섯째 아이 벤.

그 아이는 호러물에서나 나오는 악마처럼 그려졌다.

 

개나 고양이를 잡아 죽이고도 웃었으며

물건은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고 식성은

보통아이들의 2배 이상이며

생긴 것도 외계인처럼 묘사됐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것은 이 작가가

호러 기법을 동원해 쓴 것이라 하니

공포물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 아이를 전통적 이데올로기의 허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나는 벤을 이데올로기의

맹목적 추구에서 나타난 과욕이

끝내 고름이 되어 터진 욕망의 결정체라고도 보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그냥 넷째 까지만 낳고 그만 뒀으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을까.

 

하지만 살아봐서 알지만 원래 조금만 더를 외치다가

일터지고 후회하게 만드는 게

그 욕망이라는 것의 본성이 아닌가.

 

그러니 다섯째 아이는 인간 욕망의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내생각 3

 

이데올로기의 허상 쪽으로 보자면

벤은 불완전성이라고 해야 할까싶다.

 

이데올로기는 많은 대중들이

추구하는 이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모르는 사람은 사실 없을 것이다.

알긴 아는데 그래도 그래야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저런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이

그래도 라는 말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통적 이데올로기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

반문하면 그래도가 나오는 것이다.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건가요? 그래도 하는 게 좋지.

애는 꼭 낳아야만 하는 건가요? 그래도 낳아야지.

 

이런 대답은 심지어 결혼생활이 불행한

사람들도 당당히 말한다.

 

결혼하고 애 낳고 그것 때문에 불행하게 사는데

왜 그걸 그래도 해야 하는 걸까.

그건 내 생각에 아마 그래도 이게 가장

안전빵이야 라는 생각에 근거한 것 같다.

 

가장 많은 이들이 추구해온 것이며

가장 보편적인 것이니

그것을 이루었을 때 가장 내세우기도 쉽고

인정받기도 쉬운 것이다.

 

그러니 알게 모르게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아닐까.

 

여기에 나오는 부부도 그렇게 꾸역꾸역 집을 구하고

아이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며 꾸역꾸역 살아도

남들이 자신들을 어찌 바라보는 지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반대로 그러다 보니 다섯째 아이가 비정상이 되었을 때

또 얼마나 주변의 시선에 마음아파하고 비참해졌으며

그로인해 그동안 쌓아온 행복이 모조리 무너질 수 있었나.

 

전통적 이데올로기의

또 하나의 허점이란 바로 이것이라 생각한다.

남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섯째 아이는 욕망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불완전성이기도 하지만 타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의 허점인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 4

 

그리고 한편으론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추구한다는 이 말은

반대로 하면 소수의 의견을 내기에

용기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다수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내 뜻대로 산다는 것엔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인가.

 

요즘엔 좀 나아졌지만 예전엔

혼자 산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편견이 있었으며

아이를 안 낳는다는 것엔 또 얼마나 많은 편견이 있었나.

 

그걸 안 한다 기 보다는

못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 않았나.

 

그건 그만큼 전통적 이데올로기가

선택이 아닌 필수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 비정상이 되는 것이다.

 

비정상으로 보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니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추구하는 것에 비해서는

그 허상을 깨는 일에 어마 어마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허상이 꼭 가정 문제에서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표적으로 전통적 가정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를 소재로 쓰긴 했지만,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반드시 허점이 있게 마련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한 사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를 따르면서도 허점은 잘 보지 못하게 된다.

 

아니, 책의 내용으로 보면 외면하려는 경향이 커 보인다.

앞서 내가 경험했던 지인들처럼 그래도를 외치며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심지어 나도 내가 가진 이데올로기를 나도 모르게

최선이라며 여기며 지내다가

다른 쪽의 의견을 외면하게 되는 일이

생기곤 하는 걸 문뜩 문뜩 느끼곤 한다.

 

그러니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관용이 힘들어 지면서 갈등을 조장하게 될 수가 있으니

관용이 없는 사회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를 추구한다는 것은

더욱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소수이든 다수이든을 떠나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시선에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다섯째 아이 벤을 두고

다수의 행복을 위해 요양소에 보내야하느냐 아니면

그래도 내 아이인데 내 집에 데리고 와 지내야하느냐

하는 어떤 도덕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의 갈등이 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래도 다른 자식들과 가족이 있는데

벤은 비정상적인 사이코패스이니

시설에 맡기는 게 옳지 않겠나

그리 생각을 하며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해리엇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찾아간

시설 내의 모습에 대한 묘사에선

나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어나기를 기형으로 태어나서

생기건 벤보다 더 이상한 애들이 많았고

그 곳 생활이란 것이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인데

악마라 치부하며 그곳에 둘 수 있는 걸까.

 

그래서 벤을 다시 데리고 오는 해리엇을

감당할 수 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막 질책을 하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결국엔 책임 질 사람인

해리엇이 벤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고

감당 안 되는 나머지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놓고 해리엇을 나쁘다 할 것인가

다른 가족들을 무정하다 할 것인가.

 

이렇게 갈리게 된 상황에선

관용만이 답이라 생각한다.

 

자신들이 원하던 가정이 파탄나긴 했지만

벤이라고 하는 허점은 이미 들어났고

그것만으로도 괴로운데 이후의 선택에 대해서까지

갈등을 조장하며 최악으로 치달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가 만약 데이비드였고 내 아내가 해리엇이었다면

난 벤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머지 네 명의 자식과 행복하게 살고 싶기도 하고

그 네 명의 자식들이 벤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벤으로 인해 파괴되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 나중에 후회 할 것 같다.

 

불쌍하고 그런 건 알겠는데

이건 해리엇의 욕심이고 미련이다.

 

벤을 아직도 퍼즐이라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 퍼즐을 맞추지 못하면 애당초 원했던

가정의 모습은 만들어지지 않기에 갖는 미련이다.

 

이게 해리엇의 행동이

모성애를 자극한 것으로 합리화되는

그런 관점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이정도 상황이면 벤이라고 하는

퍼즐을 포기하고 새판을 짜야하는데,

맞춰지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끼우려고 하는 것 같다.

 

순수한 마음으로 갖게 된

이데올로기라는 목표에 욕심이 붙게 되니

그 결과가 강박이라는 것으로 나타나는 걸 보게 된다.

 

자신에게 강박이 있다면

그건 반드시 어떠한 목표에 욕심이 붙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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