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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독후감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독후감 2

by 생각하는 남자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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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독후감 2

 

줄거리

 

다시 벤을 데리고 왔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다.

불량학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해리엇에겐 여전히 힘든 아이.

다른 네 아이들은 각기 할아버지 할머니 쪽으로 흩어져 살게 되고,

데이비드는 돈을 벌기위해 더욱 일에 전념한다.

 

바쁜 일거리로 부부생활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커다란 집에 해리엇과 벤, 단 둘만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날이 갈수록 벤은 불량학생들과 어울리며 사고를 치고 다녔다.

 

결국 주변의 권유로 인해 그리고 상황 상 벤을 감당할 수 없던 해리엇은

집을 팔기로 결정하였고, 벤이 미래에 범죄자나 되진 않을까 염려하며 끝난다.

 

내 생각

 

전통적 가정의 이데올로기에서 행복을 찾기에는 요즘의 시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요즘엔 도리어 아이를 많이 낳으래도 못 낳는다.

아이에 대한 노력 보다는 일을 많이 해야 먹고살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워라밸  ‘WORK-LIFE BALANCE' 의 준말로 일과 생활의 균형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요즘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요즘의 상황이 일 쪽으로

너무 쏠려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통사회로 치면 워라밸이 아니라 패라밸? (FAMILY-LIFE BALANCE)

이라고 했어도 되지 않을까.

 

다산을 미덕으로 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활은 살짝 뒤로 미루고

아이를 많이 낳는 것으로 행복한 가정을 꿈꿨다면

현대엔 아이는 살짝 뒤로 밀리고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바뀌어온 것이다.

 

그런데 워라밸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가정이고 일이고간에 일단 내 삶에 가치를 찾고 싶다는 것이다.

이 부부도 벤이 태어나고 벤에게 모든 에너지가 쏠리면서는

자신들이 다른 가족들과의 온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다.

 

이제는 사람들이 내 삶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벤과 같은 파괴자가 나타나서 파괴를 하다 보니

이제는 당할 만큼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벤이라는 존재도 전반적으로 보면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파괴자가 없었으면 이렇게 허상이 드러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워라밸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의 허상을 보게 해주는 벤의 경고는

이미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게 현실인 듯하다.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경고를 해주고 있다.

 

해리엇 가정의 전통적 가정의 이데올로기도 그렇게 무너졌다.

집도 크고, 아이도 많고, 돈도 많고, 시간도 많아 행복하게 사는 그런 것.

넷째 까진 그럭저럭 버티며 지내왔지만

벤은 그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벤은 허상의 파괴자이자 밸런스의 붕괴자이다.

이것이 과거에는 그래도 이데올로기에 잡혀서 밸런스가 붕괴되어 가면서도

그런 가정을 이루며 살아갔는데 요즘엔 그게 싫은 것이다.

 

여자들도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참고 참아가며 남편에게 매도 맞고

시집살이를 지독하게 하면서도 참아가며 살아오지 않았나.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어디 그걸 참나.

내가 원하는 것과 이데올로기가 원하는 것의 밸런스가 안 맞는다.

 

이미 허상이 드러났고 가정이든 일이든 그것으로 인해 삶이 붕괴되는 것을

막고 싶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흐름은 레싱의 경고와 맞물려

이제는 자연스러운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아직 우리나라엔 이런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긴 하지만 어쨌든 관용이 필요하다.

시대가 흐르며 이데올로기가 변하고 있다.

 

가정이 중요하던 시기에서 산업화를 거쳐 일이 중요해졌고

그 시기를 거쳐 이젠 개인 삶의 질적 향상이 중요해졌다.

 

양손의 떡, 뱃골이 커진 두 사람의 가정.

그것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을 만들었다.

벤을 버릴래 데리고 살래 묻는다. 결국 한쪽은 포기해야한다.

 

내 행복의 추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닥치기 전에

그 허상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때가 닥치면 이미 늦는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땐 얻으려고 했던 것 그 하나 이상의 것을 버려야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 2

 

아무튼 벤을 집으로 다시 데리고 왔기 때문에

그로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를 힘겹게 만든다.

보면서 과연 해리엇이 얼마나 버틸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방향인 것인가 싶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해리엇의 선택이 잘 못 되었다는 인식을 주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해리엇의 특이한 심리묘사가 여럿 나온다.

우선 벤이 마치 선사시대나 아주 과거 지구에 존재했던

어느 종족의 씨앗 같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원래 이런 종족이 과거에 널리 있었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유전자 속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우연히 자신의 다섯째 아이로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그 전에 어떤 책에서 비슷한 말을 본 적이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남녀 둘만 남아도

다시 이러한 인류가 그대로 생성 될 것이라고.

 

서평에 보니 실제로 다섯째 아이를 구성하기 전에

도리스 레싱은 어느 인류학자의 저런 내용에 착안하여 이 책을 쓴 것이라 한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본다. 벤이 남인가?

그저 우연히 다섯째 아이 중 혹은 다섯 사람 중 한사람 일 뿐인 건가.

혹시 저 다섯 아이 모두 하나의 인간성 안에 들어 있는 성질은 아닌가.

 

벤 이라고 하는 아이에게 유독 응축되어 태어났을 뿐,

이미 모두의 안에는 벤과 같은 야만성이 숨어 있지 않나.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신뢰할 만 한가.

 

인간 혹은 인간성이란 게 그렇게 믿을만한 것일까.

전통적 가정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허상을 밝히고 있는 그 이면에는

이미 인간에 대한 허상이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의 유전자 한구석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혹은 우주의 어느 이상한 종족의 유전자가 퍼져있을 수 있다.

그게 언제 어떻게 벤과 같은 파괴자로 등장할 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인간성을 맹신하거나 인간성에 의지하며 살고 있나.

 

기대했던 사람으로부터 크게 실망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고

그 실망 또한 인간에 대한 허상에서 온 것일 수 있다.

전통적 가정이든 현대식 가정이든 싱글 라이프든,

모두 어쨌든 미완의 인간이 만들어 온 것들이다.

 

내 생각 3

 

벤은 그 이후에 어찌 되었을까.

책의 내용이 이끄는 대로 가보면 벤은 불량청소년이 되거나

나중에 커서 큰 사고를 치게 되는 일로 마무리 될 듯했다.

 

그런데 레싱의 후속 작 세상속의 벤 에서는

벤이 사회에 나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약탈을 당하고

방황하다 자신과 같은 종족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이걸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할지 몰랐다.

벤이 천하에 못 쓸 놈으로 나왔었는데

후속 작에선 핍박받는 존재로 나온다니.

 

이는 작가의 성향이 관찰자적인 성향이라 그런 게 있다고 한다.

어느 한 쪽에 속해서 그것이 옳다 라는 식의 입장을 피하고

이런 저런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 작가의 명칭중 하나가 카산드라 라고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왔던 그 카산드라.

카산드라는 설득력이 없는데....

 

그러니까 다섯째 아이의 구성을 보더라도

전통적 가정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들이 보기엔

사실 설득력이 없을 수 있고 억지라는 얘기를 들을 수 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책에서도 벤을 구하는 게 맞는지

다른 가족을 위해 벤을 입원시키는 게 맞는지에 대해선

그 어떤 판단을 내린 적이 없긴 하다.

 

다만 그럴 수 있으니 벤의 입장도 되어보고

부모의 입장도 되어보자는 그런 관찰자의 입장인 것이다.

그리고 벤이 되어보니 핍박받으면 자기와 비슷한 부류를

찾아가기도 하겠구나하는 그런 관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평엔 이것을 동질화라는 것으로 표현했다.

내가 하나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이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벤은 분명 문제아인데 왜 저명한 교수들이나 의사들 모두

이 아이를 평범한 범위 안에 있는 아이라 칭하고

다만 잘 돌보지 못한 해리엇의 탓만 하냐는 것이다.

 

해리엇이 상당히 억울해 한다.

그들의 입에서 이 아이가 비정상이라는 얘기가 나오길 바란다.

심지어 동네 사람들도 벤이 해리엇 탓이라고 한다.

 

이 이유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동질화라는 개념을 통해 보니

그럴 법하다 싶다. 이상한 아이라도 어른들의 세계에 동질화 시키려는 행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벤이 나중에 범죄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는 것.

그리고 그런 벤도 자기와 같은 종족을 찾아가는 것.

이것은 자신과 동질화 시키려는 인간들에 의해 생기는

고립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 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고립된 벤도 결국 자기와 같은 부류의 종족을 찾아간다.

동질화는 결국 인간들이 뭉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이라고 하는 생존욕의 다른 개념인가 싶기도 하다.

 

내가 책을 보며 벤을 고립시키는 쪽 선택을 하게 된 것도,

어쨌든 남은 사람이라도 잘 살아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 아닌가.

살려면 그래야한다는 선택이다.

 

현명하다고 해야 할지 잔인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문제에 대한 선택은 시간이 지나 바뀌지 않으면서도

늘 고민을 자아내게 만든다.

 

다른 예로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벤과 같은 사람들의 사건과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악플을 한번 보자.

사건 사고에 화가 나고 그러는 건 알겠는데 왜그렇게 까지

남 얘기같이 함부로 헐뜯고 욕하는 걸까.

 

동질화의 개념으로 보면 나는 저쪽 벤과 같은 부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벤을 고립시키고 그는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나는 니들과 달라’ 이것을 그렇게 악플로 남기는 것이다.

 

벤이나 그들이나 잘한 건 하나도 없지만

이랬거나 저랬거나 그들을 고립시키려는 시도와

다시 동질화를 시도하려는 시도는 잔인 해 보이긴 한다.

 

작가의 관찰자적 성향대로 정말 어느 게 맞다고 하는 게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벤과 같은 아이를 고립시켜서 나머지라도 잘 살게 해야 한다는 것인지,

그래도 좀 동질화 시켜서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인지 말이다.

 

다만 인간성이라는 게 그렇게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나머지 가족을 위해 벤은 버리자는 게 인간적이라 할 수 있나.

아니면 벤 하나를 위해 나머지를 희생하는 게 인간적이라 할 수 있나.

그냥 미완의 인간성을 가진 인간들의 인간적인 행태들이다.

 

그러니 이미 인간적이기 불가능한 세상에 살며

너무 인간적이어서 문제가 되지 않게,

너무 비인간적이어서 문제가 되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든다.

 

아무튼 레싱은 이렇게 관찰자로서 어느 한 쪽에 속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동질화로 인해 생긴 고립된 사람들의 문제점도 생각 해 보고

고립시키지 않아 생기는 문제점도 생각 해 보자는 것이다.

 

벤은 저자의 의도대로 이미 그런 종족으로 분류될 만큼 특이한 아이이다.

그냥 교육의 문제고 관심의 문제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확정되어 태어난 아이이다.

 

벤을 고립시켰어도 요양소에서 죽었을 태고,

벤을 품었더라도 결국 벤은 세상에 나가서 고립되고 말았다.

이는 결국 어느 쪽을 택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동질화되기 힘든 존재가 세상에 나와 결국 어찌 될 수밖에 없는지

그것을 먼저 관찰하고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는 것이라 본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종족이라고 여겨질 만큼

괴물 같고 악마 같은 아이도 결국 사회에 나오면

약탈당하고 핍박받을 수밖에 없을 만큼 인간들 세상이 무섭다는 것도 생각해본다.

 

설득력을 잃은 예언자 카산드라.

레싱이 카산드라라면 벤을 통해 예언을 했다.

전통적 가정의 이데올로기의 허점을 맹신하면 어찌되는지,

인간성이라는 것을 맹신하면 어찌되는지.

예언하고 경고할 뿐 그것을 따를지 말지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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