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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독후감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독후감 2부

by 생각하는 남자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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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독후감 2부

 

카말라

 

줄거리 

 

그렇게 세존을 떠난 싯다르타.

모든 자연의 모습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다닌다.

 

스승을 두지 않고 자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기로 한다.

 

그동안엔 외부의 것은 나쁜 유혹이고

금기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며 내면의 자아만 보려 했지만

이제 눈에 보이는 것들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고자한다.

 

내면과 외부. 

감각적인 것과 사고적인 면 모두를 함께 보기로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마을에 이르러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카말라’. 

기생의 마을에 사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사랑 해 본적 없는 싯다르타는 그녀에게 사랑을 배우고자 한다.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좋은 옷과 신발과 많은 돈을 가져오라 했고

싯다르타는 돈을 벌기위해 수염도 자르고 깨끗이 입고

사문의 생활을 청산하여 돈을 벌기위해 나선다.

 

내생각

 

속세의 법은 엄연히 사문의 법과는 달랐다.

사랑 하고 싶으면 선물도 사오고

그러려면 돈도 벌어와야한다.

 

사유하고 단식하고 그런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게 싫으면 그냥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야한다.

 

목적이 해탈이었고 그 수단으로서 온갖 고행을 했으니

지금까지의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사유와 단식 등의 능력이었다.

 

저 숲으로 들어가면 날고 기고 할 수 있고

제법 수행자로서 대우도 받을 수 있을 텐데

여자한테 이런 대우나 받고

정말 자존심 상할 만 하지 않나.

 

하지만 이에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에서 그의 고집이 꺾인 것이 보인다.

 

그리고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보인다.

 

고집을 부리지 않고 오직 목적에 충실하니

그런 그 모습이 순수해 보인다.

 

지금까지 그의 행보 중 그 어느 곳에서도

이처럼 고분고분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 앞에서도, 친구 앞에서도, 

스승 앞에서도, 심지어 세존 앞에서도.

 

그런데 유일하게 카말라 앞에서 고분고분하다.

진심으로 알고 싶어

자발적으로 나선 이의 모습이 이렇다.

 

 

어린애 같은 사람들 곁에서’, ‘윤회’, ‘강가에서

 

줄거리 

 

싯다르타는 카마스와미라고 하는 부유한 자를 찾아가

그 자 밑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오며

카말라에게 사랑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렇게 돈을 버는 장사꾼 역할을 하면서도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어가며 돈을 벌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즐거움도 느끼며 지내는 싯다르타.

 

하지만 돈이나 인간관계 등 사문으로서 보기엔 하찮고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은 것들에서 유희를 느끼고 사는

어린애 같은 사람들을 보며 싯다르타는

여전히 경멸스럽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됐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어느덧 40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는

젊었을 때의 사문으로서의 자부심, 

자신이 배웠던 사유하는 힘이라든가

단식의 힘 그리고 세존께 들었던 말씀 등등

 

모든 것들의 기억이나 능력이

서서히 옅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보니 자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며 그들의 유희를 누리고 있었다.

 

사랑을 가르치던 카말라의 얼굴에도

주름이 생기고 자신의 얼굴도 추해졌다.

 

끝날 수밖에 없는 무상한 것들에

유희를 느끼던 자신을 돌아보며

그간 윤회의 삶을 살고 있었다고 자각한 싯다르타.

어느 날 그곳에서 뛰쳐나와 강가에 이른다.

 

그곳에서 그동안 유희에 빠져 살던 것에 대한

역겨움에 견디기 힘들어 강물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려는 순간 깨달음을 얻는다.

 

완성을 뜻하는 을 외우며

자살을 멈추고 어린애 같은 미소를 짓는다.

 

이제 자신이 빠져 죽으려던 강을

다시 바라보며 자신을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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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그토록 자신이 비웃었던 사람들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자신이 비웃던 사람들처럼 되었다.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했는데 저렇게 되었다.

 

우리도 살다보면 그렇게 살지 않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욕심 안내기 어렵고, 

사랑 안하기 어렵고, 

화 안내기 어렵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는 것을 아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그게 쉬우면 고뇌가 생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칫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거만해진다.

 

싯다르타가 얼마나 사람들을

쉽게 봤으면 어린애 같다고 했을까.

 

유치한 유희놀음에 빠지지 않는 게 얼마나 쉬운데

그걸 못해서 저렇게들 애처럼 사는 것인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쉽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흔들리지 않던 싯다르타가

서서히 그들처럼 되어간 것은

자신이 이미 사문이길 포기한 순간 부터였다.

 

사문을 그만두고 사람들 속에서도

자신의 것을 잡고 가던 싯다르타가

그래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명석했다만

결국에는 시간 앞에 무력해지는 걸 본다.

 

자신이 집중해서 잡고 가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놓는 순간

이미 퇴보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는 스토리다.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의 삶에 완성이란 건

물러나지 않는 것 말고 또 있을까 싶다.

 

여기에서 일전에 세존을 만났을 때

세존께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는 싯다르타.

지나치게 똑똑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무엇이든 최고로 잘했던 싯다르타였다.

최고의 바라문, 최고의 사문, 

최고의 장사꾼, 최고의 사랑꾼

뭐든 최고가 되고 최고로 살아온 듯하지만

대체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왜 빨대를 한군데에만 꽂아야 하는 것이며

왜 스승이 있는 것이 복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똑똑한 사람이 수행을 잘하고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있고 한길만 파는 사람이 수행을 잘하게 된다.

 

세존을 떠나 스스로 체득하겠다 한 것은 기특하나,

그 과로 여기저기 빨대를 꽂아볼 수밖에 없었던 점과

스스로 지나침을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 한계로 들어난다.

 

스스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가는 길은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본다.

 

내 생각 2

 

나는 그가 자살하려다 말고 깨달은 것이 무엇이며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칭찬하고

다시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강을 바라봤는지 궁금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가 강가에서 느꼈던

구토증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하던

어린애 같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생활 하면서

자신도 역시 그런 사람들처럼

되어버린 것에 대한 구토증.

 

아마 이런 구토증은 누구라도 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지긋지긋한 면이나 역겨운 면

증오스럽고 경멸스러운 면을 타인에게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살다보니 자신에게 그런 면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 구토증이 심하다 못해

강물에 빠져 죽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왜 을 느끼고

다시 태어난 느낌을 받았을까.

 

싯다르타의 사유를 쭉 따라가 보자면 내 생각엔 이렇다.

구토라는 건 내 안의 더러운 것을 뱉어내는 행위이다.

즉 싯다르타는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뱉어냈다는 것이다.

 

그걸 삼기고선 그 역겨움 속에서

역겨운지도 모르며 살지도 않았고,

그걸 견디지 못해 결국

괴로운 상태로 살아가지도 않았다는 것.

 

즉 과거사 더러웠던 자신을

과감히 내뱉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 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러운 것을 삼키고서도

더러운 줄 모르고 산다.

 

이런 건 먹어도 안 죽어. 

사는데 지장 없어. 

다들 이러고 살아.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일반적인 유희에 젖어 사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이걸 견디지 못해 괴로워하거나 자살한다.

 

그리고 극소수의 사람들이

이걸 뱉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떨쳐낸 후 새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경멸이나 증오 다른 번뇌 없이.

자신이 걸어온 길만을 온전히 바라본 결과

이것이 구토가 나올 만큼의 삶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싯다르타의 사유를 보면 무엇이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지 알 수 있다.

계속하여 타인을 낮게 보던 싯다르타는 이제 없다.

 

어린애 같은 사람들이든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든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고 멀리하던 사문의 삶에서 나아가

자신의 모습에서 구토증을 느끼는 삶.

 

그리고 자신이 삼킨 그 오물을 오물인 줄 알고

그것으로부터 한 꺼풀 벗겨질 수 있는 삶을 살게되었다.

 

뱃사공, 아들, , 고빈다

 

줄거리 

 

길을 나선 싯다르타는 자신이

사문이었을 때 배를 태워준 바주데바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강물에게 귀를 기울여

강물의 소리를 듣는 명상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세존께서 곧 열반에 드신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서 나타난 사람들.

그중 카말라와 자신의 아들을 만나게 되는데

독사에 물려 죽은 카말라를 대신해 아들을 키우게 된다.

 

어느덧 아들에 대한 사랑에 푹 빠지게 된 싯다르타.

늘 친절한 미소를 지어주지만 곱게 자란 습관 탓에

아버지에게 심하게 대들기만 하는 아들이었다.

 

바주데바의 조언대로 아들을 외지로 보내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야 하지만

마음이 그렇지 못한 싯다르타.

결국 아들은 도망가고 가슴에 상처를 입은 싯다르타다.

 

이후 자신이 그토록 유치하고 어린애같이 생각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달리보이기 시작하는 싯다르타.

자신도 어느덧 그들처럼 유치한 사랑에 가슴아파한다.

 

자신의 상처에 대해 모든 것을 바주데바에게 털어놓고

다시 한 번 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싯다르타.

그동안 흘러왔던 자신의 모습을 모두 돌아보고

자신과 강물을 동일시하며

어느덧 환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내 생각

 

마지막엔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의 장광설이 이어지고

그러는 만큼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지 이해는 되면서도

뭐라 설명하긴 힘든 그런 말들이 많이 나온다.

 

다만 그중에 나에게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단일성 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해탈을 위해 자아를 비우고

평온을 찾기를 바라던 청년 시절의 싯다르타,

지혜는 말로 전달될 수 없음을 알고

세속으로 뛰어든 젊은 시절의 싯다르타,

세속의 삶에 젖어들어

애욕과 고통을 맛본 노년의 싯다르타.

 

강물을 보며 명상한 끝에 결국 그동안의 자신의 모습이

모두 하나의 강물처럼 단일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이 단일성이라는 표현을 잘 몰랐다.

그런데 이게 책의 후반부까지 가보니

내가 그동안 그토록 찾고자했던 단어가 아니던가.

 

데미안을 통해선 단순히 내가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모두 반반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고 있었다면

이것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단일성이다.

 

선과 악, 미추, 생사, 무엇 무엇 이렇게 나뉘는 것들

이렇게 말로 표현될 때는 한쪽 면만을 표현 할 수밖에 없다.

 

이 얘기는 결국 말로 전달하는 것은

반쪽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 아닌가.

 

그런데 대부분은 한 순간에

한쪽만 보고 옳다며 달려가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고 저 양면이 모두 하나라고 말하더라도

그걸 쉽게 납득하거나 믿지는 못한다.

선이라 하고 악이라 하고 아름답다하고 추하다한다.

 

그렇다면 말이란 것이 생기면서부터

이것은 이렇게 나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인데

부처님께선 이렇게 나뉜 것을 두고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었던 것일까.

 

잘 나뉘었으니 잘 분별해서 행동하라?

이것은 선이니 행하고 이것은 악이니 행하지 말라?

추한 사람 멀리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가까이하라?

 

그도 그렇지겠지만 최종적으론 단일성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나누어 놓은 개념이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세상은 그렇다는 것이다.

 

동전의 앞과 뒤를 나눠 설명하는 건

동전이란 걸 알게 하기 위함이지

그래서 어느 것을 지향하라는

그런 의도가 아니듯이 말이다.

 

왜 깨달은 싯다르타의 눈에 자연물들이 모두

그전과는 다르게 보였을지 잘 몰랐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것들 모두 생주괴멸하는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었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바라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인간과는 다른 것들. 

혹은 인간들 중에서도 나와는 다른 인간.

이런 것들은 이미 모두 색안경을

하나 쓰고 바라보는 상태이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처지 혹은

단일한 존재라는 시각은 색안경을 벗은 상태이다.

 

오직 뱃사공만을 평생 직업으로 여겼던 바주데바가

그 오랜 기간 해탈을 위해 수행하던

싯다르타에게 영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색안경 하나의 차이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언제부터 갈등이 생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이렇게 저렇게 나누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던 것일까.

사실은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지나치게 똑똑하려는 행위 아닌가.

 

강물이 흐르고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그게 다시 증발해 비로내리고

다시 또 흩어지고를 반복하는 것인데

이 것이 모두 단일하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나뉘는 것만을 분석하며

호오를 가리고 하며 스스로 똑똑해진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못 알아듣는 고빈다에게

싯다르타는 돌멩이를 하나 들고 쉬운 비유로 설명해준다.

 

사문일 때의 자신이었다면

이 돌멩이가 흩어지고 다시 어찌되고

사람이 되기도 하고 뭐 그러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이 돌멩이가

곧 자신과 동일한 처지라고 생각한다.’

단일성과 같은 맥락이긴 한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한편으론

단일성과 대치되는 개별성 혹은 독립성도 있다.

자칫 단일성에 빠지면 이 역시도 우리가 남이가 식으로

갈등상황에 빠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선과 악 모두 세계를 이루고 있고 단일한 것이니

다 용서되고 그냥 그런 거야 하며 방관하란 것인가.

 

그게 아니라 방관할지

그것으로 자비심을 낼지는 나의 선택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선택을 위해

개별성 하나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 보다는

단일성과 개별성 모두를 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선과 악이 개별적으로 나뉘고, 

또 그것이 합쳐져 단일성을 띈다.

 

지혜는 양쪽 면을 다 볼 수 있는 눈이다.

내 눈이 왜 두 개일까. 양 면을 다 보기 위함이 아닐까.

 

지금까진 늘 나누고 개별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다면

이제 한쪽 가슴엔 단일성을 간직하고

한쪽 가슴엔 개별성을 간직한 체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별성은 존중하되 단일성을 잊지 않는 것.

지금 뭔지 모르게 딱딱하고 허했던 가슴이 따뜻해지는 건

이 단일성이라는 없던 개념이

들어왔기 때문 아닌가 생각한다.

 

만일 내가 단일성과 개별성이라는

균형 잡힌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 책에 나오는 고타마와 싯다르타처럼

빛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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