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독후감 2부
줄거리
요조는 형무소에서 나와 지인의 집 단칸방에 살게 된다.
매달 형제들로부터
부모님 몰래 들어오는 적은 돈 말고는
딱히 그에게 쓸 만한 돈도 없었고 매우 궁핍하다.
그러던 중 옛 친구 호리키를 만나러 가게 됐고
그 곳에서 호리키의 직장 상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요조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 주었다.
이름은 시즈코.
남편과 사별 후 시게코라는 딸을 키우고 있다.
요조는 그 집에서 시게코와 놀아주기도 하고
시즈코의 회사에 만화도 연재하며
대충 쓸만한 수입이 생겼다.
이때 간만에 찾아온 호리키는
술에 취해 요조에게 험한 말을 한다.
여자 호리는 일은 세상이 용서하지 않는다는 둥
세상에서 매장당한다는 둥....
내 생각
이 부분에서 요조의 인식이 전변하는 것을 느꼈다.
호리키가 요조에게 내뱉는 말에서 나타난 전변이다.
세상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인가?
호리키 니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세상에서 매장 당하게 되는 것인가?
호리키 니가 매장 하고 싶은 것이겠지....
아, 세상이란 개인이구나.
세상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니
그때그때만 이기면 된다.
온갖 대의명분을 늘어놓지만
그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이 이후로 요조는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게코의 말을 빌리자면 시게코를
그다지 귀여워해주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말은 아마 시게코를 귀여워해주던 것도
결코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뜻 같다.
이렇게 쭈욱 보면 요조가
여태껏 자신의 의지대로 한 것이라곤
자살시도 말고는 크게 없었던 것 같다.
나머진 대부분 상대의 의지에 맞게끔
익살을 떨어주곤 했던 것이다.
그런 요조의 인식의 전변은
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조심스레 그의 입장이 되어보면
그것은 자신이그동안 두려워하던
세상 혹은 인간이란 것에 대해
이는 세상 전부가 아니라 단지 한 개인 개인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이를 태면 호리키가 한 말을 가만 들어보면
세상 혹은 대의명분을 내세워
요조를 용서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건 호리키의 입장이지
세상이나 여타 대부분 인간의 입장은 아니다.
사람 다 똑같은 것도 아니고
언제나 내 앞에 있는 건
세상이기보단 한 개인인 경우가 대다수다.
그리고 그 개인들도 모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니
내가 상대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을 바라보는 개인일 뿐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개인 개인을 상대하려는 자세가 된
요조에게는 어느 정도 융통성이라는 게 좀 생겼나 싶다.
어떤 개인을 만나 좌절하여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원망 할 필요도 없고 좋은 사람을 만나 기뻐하며
세상을 참 아름답다고 할 필요도 없다.
모두 자신의 눈에서 세상을 본다.
그들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고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
혹은 개인이 어떤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최근에 세상이 밝아보였나.
그렇다면 혹시 최근에 접한
개인들이 밝았던 것은 아닐까.
내가 최근에 세상이 어두워보였나.
그렇다면 혹시 최근에 접한
개인들이 어두웠던 것은 아닐까.
요조는 타고난 겁심 외에도
어릴 때 가정환경상 지나치게
나쁜 개인들 사이에서 자라
그걸 세상이라며 생각하고
자라지는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개인 개인을 상대하려는 마음을 낸 요조에게서
뭔가 살아 숨 쉬는 생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의지대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다.
줄거리
개인 대 개인의 투쟁으로 호기롭게 세상에 맞서긴 했다.
그러나 의지도 있고 부끄러움이 줄긴 했어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자신있게 술먹고 돌아다니던 요조는
요시코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녀의 무조건적인
신뢰성에 반하게 되어 결혼하기에 이른다.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을 믿어주는 처녀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 앞에 교우인 호리키가 나타나고
겉으로만 친한척 하던 호리키의 본성은
역시 요조를 증오하는 것이었다.
그런 호리키와 술을 마시던 중
요시코가 한 남자에게 겁탈을 당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대해 요조는 그런 자신을 방관하고
비웃기라도 하는 듯 처다보는 호리키에 대한 분노와
요시코의 무한 신뢰가 상처받고
오염됐다는 것에 대한 분노로 가득찼다.
이후 매일 매일이 술이던 그는 결국 각혈을 내뱉게 되었고,
그 와중에 술을 줄이기 위해
약국에서 산 약물에도 중독되게 된다.
어느날 친구 호리키가 나타나
따뜻한 웃음으로 요조를 맞이하고
이에 감동을 받아 그를 따라간 요조.
그곳은 정신병원이었다.
다시한번 자신이 믿고 아무런 저항 없이
따라갔던 것에 대한 회의가 일었고
자신은 정신병원에서
‘인간실격’ 이 되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온 후에도
식모에게 잘못된 약을 처방 받은 일로
실소를 터트리게 되고 자신을 ‘폐인’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나가면서는
뭐라 표현 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나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
세상을 개인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힘차게 나서던 모습에서 의지대로 힘 있게
살 것을 기대했건만 순진하고 의심 없는
요시코와 만나서 행복하게 사나 했건만.
그 누구도 신뢰하지 못했던 요조에게
요시코의 장점으로 다가왔던 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였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처참히
짓밟히고 오염 돼버리다니.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 인가요’
이 물음을 던지는 요조에게 뭐라 해줄 말이 있을까.
중도를 얘기하며 적당히 믿었어야 한다고
해야 하나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해야 하나.
아 그냥 생각도 하기 싫은 장면이다.
그저 내가 요조가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
더 이상 이 사건에 대해 말하고 싶지가 않다.
요조는
'차라리 불륜을 저지른
아내의 남편이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건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아내가 마음이 동해서 그런 것이니
그 죄를 따지고 남자는 어찌 처단할지
그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요시코는 아무런 의지도 없이
들어온 남자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짓밟히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는 여자가 되었다.
요조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무엇인가.
개인과의 단판승부로 하나하나
세상으로 나서고자 하는 요조에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단순히 세상은 개인이니 개인만 상대하면 될 것 같았지만
그 상대가 너무 교활하여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온다.
요조는 그 나약함 때문에 좌절하는 듯하다.
신뢰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용하려는 사람들 앞에선
한없이 나약해질 수 있는 수단이 돼버린다.
그러니 마치 강한 인간이 되려면
사람도 믿지 말아야하고
겉으론 온갖 좋은 말은 다 하지만서도
뒤로는 반드시 자신의 이익을 챙겨야만 하는 것이다.
책의 맨 앞에서 나왔듯이
세상은 실용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무엇을 하나 만듦에 있어서도 그렇고
우리가 대하는 면에서도 실용성을 따지게 된다.
그 실용성에 인간의 신뢰 따윈 도구일 뿐이라는 것 같다.
그냥 신뢰고 사랑이고 뭐고 간에 실용적이면
알아서 사람들이 이용하고 좋아하게 될 것이고
쓸모없어지면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냥 버려지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늘 그렇게 배웠다.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고 믿어주고.....
그런데 좀 살아보면 결국
쓸모 있어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요조의 일과 그 슬픈 마음은 참으로 더 말할 것이 없다.
다만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쓸모에
맞춰 살지 못했던 것 아닐까 싶다.
이곳이 천국도 아니고 유토피아도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신뢰가 죄인가 아닌가를 말하고
선과 악을 말하고 하소연해도
실용적이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서 외면당하게 되는 그런 곳이다.
*
요조가 약국아주머니를 대하는 장면에서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을 알아보게 된다고 했다.
그 아주머니도 미망인에 자식도 병이 있고
시어머니도 병석에 있으며 자신도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남 얘기 같지 않고 씁쓸할 뿐이다.
지금도 TV의 한쪽에선 세상이 참으로 살만한 곳인 것처럼
웃고 즐겁고 재밌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뒤를 돌아보면 온통 아프고 지친 사람들이 보이니 말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게 살다가 가는 것이지만
인간실격이라는 책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온 것은
인간이 인간을 괴롭게 한다는 현실이었다.
신뢰가 무너지고 불신이 미덕이 되는 현상도,
겉과 속이 다르게 살게 되는 현상도
그로인해 인간을 쓸모에 따라 물건처럼 여기는 현상도
모두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온 문화라고 볼 수 있다.
참고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를 보았다.
그는 일생에 5번의 걸친 자살 시도를 한 후
마지막 5번째에서 끝내 죽고 말았다.
첫 번째 자살시도는
학창시절 학기말고사를 앞두고 한 것.
두 번째 자살시도는 가족의 권유로 결혼하고
나오자마자 다른 여자와 정사 후 동반자살시도 한 것.
그리고 세 번째 자실시도는
대학 졸업 가망이 없다는 것을 확인 후
자살 시도 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세 번의 자살시도를 보면
그가 어떤 성향인지 알 수 있다.
우선 그에게 생가의 중요성이 매우 컸다는 것이다.
부유한 집 자제로 태어나 공부도 잘하고 싶었고,
충실히 졸업도 하고 싶었고 결혼도 무난히 하길 바랐다.
그런 생가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올 때마다
자살이라는 수단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시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더불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뇌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오사무의 선택이 매치가 되기도 한다.
단순히 인간이 두렵고 견디기 힘들어
죽는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생가에
누가 되는 일이 생기기 전에
명예롭게 죽고 싶은 그런 심정이라는 것이다.
이것 참 멋있지 않나 싶다.
자신이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
그렇다고 부끄러운 자 모두 죽어야한다면
살아남을 사람 몇 없겠지만
꼭 그런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알고
그에 대한 처신을 자살이 아닌 그 무엇으로라도
책임지려는 행위를 해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네 번째 자살시도는 그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아내의 불륜에 대한 충격으로,
다섯 번째 자살시도는
일본의 패전에 대한 환멸과 실망 때문이었다.
복막염에 대한 치료제로 먹던 약에 중독이 되었는데
자신이 믿던 아내와 스승마저도 자신을 속이고
정신병원에 집어넣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느낀 것이 인간 실격이다.
그런데 마지막이 된 다섯 번째 자살시도가
그에게 가져온 실망감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자살을 할 정도인가 싶었다.
나라 잃은 기분이란 게 이런 건가.
하지만 그의 입장이 되어보면
역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도
자신이 그렇게 부를 누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비합법 공산주의에 가담하게 되었고
나라를 위해 다함께 힘을 썼지만 그것이 무산되었다.
제국주의를 외치던 윗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민주주의를 외치기 시작했고
뜻있는 자들 사이에선 그 부끄러움이
감당이 안 되었던 것이다.
아....부끄러움이라는 것도
힘써본 자들이나 가질 만 한 것이로구나.
노력도 안 해보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고 애쓰고 노력해 본 다음에
밀려오는 것이 진짜 부끄러움이구나.
진정 부끄러움을 알고 싶거든 기를 쓰고 해 봐야하는구나.
그렇게 해보고 또 해보고 추락해봐야 아는 것이구나.
그걸 일본 패망이후 젊은이들이 느꼈겠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노력해보지 않았거나 진심이 아니었겠구나.
정치인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이런 이유이겠구나.
나랏일에 진심이었다면 그럴 수 있을까.
인간 실격은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되어야하는데
부끄러움을 아는 이들이 오히려
인간으로서 실격되는 일이 벌어지는구나.
부끄러움을 알되 실격되지 않게 강해져야 하는구나 싶었다.
아무튼 인간실격은 살아가며 무엇을 부끄러워해야하고
무엇에 죄책감을 느껴야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었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과 진심을 다해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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