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독후감
줄거리
1.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는 부족한 것 없는 바라문의 아들이었다.
총명하기는 말할 것도 없고
부와 명성 인기를 모두 얻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자아로부터 벗어나 아트만의 존재를 깨닫고
그것과 자신을 일치 하는 것만을 추구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고행을 하는 사문들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자신을 사랑하던 친구 고빈다와 함께 길을 나선다.
2. 사문들과 함께 지내다
사문들과 오랜 고행을 하게 되지만
역시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오랜 고행으로 잠시 자아를 벗어나 보기도 하고
새가 되기도 돌이 되기도 해보며
죽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새 결국 다시 자신인
싯다르타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겪게 되고
자신도 사문의 늙은 스승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결국 해탈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의구심이 생기는 바람에
이곳을 떠나야하나 어쩌나 고민을 하게 된다.
3. 고타마
기원정사라는 곳에 모든 것을 깨닫고
해탈을 얻으신 ‘고타마’ 라는 부처님이
설법을 하러 오셨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싯다르타는 나서길 원치 않았지만 고빈다의 강한 권유로
함께 사문을 나와 고타마가 있는 곳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부처님의 완성된 모습을 뵙고
친구 고빈다는 바로 제자가 되었지만
싯다르타는 고타마를 뵙고도 제자가 되길 원치 않는다.
고타마는 그런 싯다르타의 뜻을 수긍하고 보낸다.
4. 깨달음
홀로 길을 나선 싯다르타는
다시금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탐구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알고자했던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한순간이고
도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작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엔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자아를
알아야겠다는 것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 순간에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다는 외로움도 느꼈다.
다만 깨달은 후에는 세상에 보이는 만물들이 모두 달리 보였고
꽃, 나무, 바다, 강 등 모두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집도 아닌 숲도 아닌
어딘가로 향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내 생각
인상 깊게 봤던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헤세.
그의 유명한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책 ‘싯다르타’ 이다.
우선 제목부터 호기심을 끌기 시작했고 헤세의 싯다르타는
대체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경전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지만
소설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이야기의 구도가 매우 흥미롭게 진행된다고 느끼게 되었다.
우선 사문들을 따라 나가겠다는 싯다르타를
만류하는 아버지 앞에서 그가 했던 행동이 인상적이다.
예상했던 대로 쉽사리 출가하라고 하실 아버지가 아니었다.
뭐 하나 아쉬울 것도 없는 태자가 출가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뜻을 밝히는 자세가 멋있다.
문밖에 나가 밤새도록 굳건히 서서 팔짱을 딱 끼고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것이다.
아들아 너 이제 지칠 텐데? - 지칠 것입니다.
아들아 너 이제 졸릴 텐데? - 잠은 안 잘 것입니다.
아들아 너 그럼 죽을 텐데? - 죽을 것입니다.
의지의 표현이란 걸 이 얼마나 폼 나게 하는지 모르겠다.
흔한 천막농성이나 단식투쟁에 비해
왜 이리 폼 나게 보이는 걸까.
기왕 의지를 표현 할 거면 이렇게
팔짱 딱 끼고 눈 부릅뜨고 서있으면 얼마나 멋있을까.
그저 앓아누워서 아픈 티 배고픈 티 온갖 티는 다 내며
농성하는 그런 떼쓰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아버지의 허락이 딱 떨어지고 나서야 살짝 휘청거리며
그런 아버지에게 큰 절을 딱 하고 나서는 싯다르타.
뭘 해도 하러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책에 나오는 시 한 구절이 이렇다.
‘옴은 활이고 화살은 영혼이다.
바라문은 과녁이다.
과녁은 어김없이 맞춰야한다.’
그가 사문이 되고자 했을 때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고
이것은 막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미 그의 영혼이 사문으로 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것은 그저그런 사문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
어차피 사라질 것들에 대해 만족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것,
무상한 것들에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방황일 뿐이라는것에서 오는 결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영혼의 화살이 과녁에 꽂히는 순간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것 같다.
이럴때 보통 처음부터 땡깡을 피우는 어른은 별로 없다.
처음엔 의지의 표현이라고 시작은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땡깡이 되어가는 것은
결국 자기가 챙길 건 다 챙기고 부탁은 들어달라는 경우이다.
반면 싯다르타는 이미 목숨을 내놓고 서있다.
어른이다. 그것도 매우 성숙한 어른이다.
바라문의 아들이니 아버지의 허락은 필수.
내놓을 것은 내놓아야 떠날 수 있는 것이 순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 목숨만큼의
무게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지치고 죽을지언정 잠은 안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그의 구도의 길에 멋진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내 생각 2
싯다르타가 사문들을 따라
고행을 하며 하게 된 고뇌가 인상적이다.
어느 정도 시간 동안은 자아를 떠나 있을 수 있는
경험을 하긴 하지만 이내 곧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술 취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게 술 먹고 잠시 내가 누구인지 잊고 지내는 것과
깊은 침잠을 통해 일시적으로
나를 벗어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
게다가 이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 없이
계속 행하고 있는 사문의 스승과 고빈다.
아니 스승이라는 사람도 늙도록 이정도 수준이라면
자신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있냐는 것이다.
이정도면 의문을 갖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이다.
언젠간 되겠지 하며 마냥 따르는 것이 한심한 것이다.
이토록 먼저 가신분의 역할이 크다.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가 아니라
나도 저렇게 돼야지 라는 생각이 들어야하니 말이다.
이런 고민을 하던 싯다르타는
어느 날 고타마의 존재를 듣게 된다.
여기서 스토리가 약간 꼬일라고 했다.
싯다르타와 고타마가 같은 인물 아닌 건가.
아마 이야기의 설정이
싯다르타가 붓다를 만나는 것인가 보다.
그것 참 흥미진진하게 되었다.
아무튼 싯다르타는 고타마를 만나러 가길 원치 않았지만
고빈다의 끈질긴 권유로 동행하게 된다.
그런데 사문의 스승이 이를 듣고 노하여 소리치게 되는데
싯다르타가 눈빛으로 한순간에 제압하게 된다.
이런 장면을 데미안에서도 본 적이 있다.
침잠에 드는 장면이라든가 눈빛으로 제압한다든가
독심술을 쓴다든가 하는 건 헤세의 특징인가 보다 한다.
어쨌든 이상하진 않다.
싯다르타가 사문 스승의 밑에 있으면서
이미 알게 모르게 스승을 뛰어넘는 것들을
스스로 터득하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고빈다가 이에 놀라서 싯다르타에게
당신이 사문에게 조금 더 배웠다면
물위도 걸어 다닐 수 있었겠다고 하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며 고빈다와 함께 떠난다.
결국 독심술이든 신통이든
싯다르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고타마를 찾아 떠나는 것도 자아로부터 벗어나
아트만을 찾고 해탈하는 그것을 알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게 사문의 스승은 싯다르타에게 3년 만에 추월 당했다.
누가 이런 싯다르타를 감당 할 수 있을까.
재능있는 제자는 스승에게 과연 복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배우는 것이 복이자 벌이라면
가르치는 일도 복이자 벌일 수 있겠다.
그도 수많은 사문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스승이었을 텐데
이렇게 되다니 제자들은 딱 스승의
수준 이하만큼만 성장할 것이다.
데미안에서도 싱클레어는 수준을 파악하고
피스토리우스를 떠났다.
이제 곧 세존을 만날 싯다르타가 어떨지 궁금해진다.
내 생각 3
드디어 싯다르타는 세존을 만났다.
그런데 고빈다는 바로 세존의 제자가 된 것에 반해
싯다르타는 제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함께 제자가 되자고 울며불며 외치는 고빈다를 뒤로하고
싯다르타는 길을 떠나며 세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둘의 대화가 이어진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자신의 의견은
세존께 말씀드리고자 했다.
이 둘의 대화에서는 그 어떤 격 떨어짐도
다툼도 보이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 붙잡지 않는 세존과
예의 있게 질문하는 싯다르타였다.
싯다르타의 의견은 이런 것이었다.
세존은 완성된 존재이고
인과의 법칙도 진리도 모두 맞고
그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자신이다.
하지만 그 법칙 안에는 딱 한 가지 틈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해탈이라는 것이다.
해탈은 이 법칙을 모두 깨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에 또 세존은 말씀하신다.
의견은 누구나 있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하지만 세존의 가르침의 목적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오직 해탈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싯다르타는 세존에게 다시 말한다.
의견 대립으로 다투고자 이러는 게 아니라
세존의 가르침에 빠져있는
단 하나의 비밀 때문에 제자가 못 된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체득이라는 것이다.
세존께서도 스승 없이 홀로 체득하여 깨달은 바를
아무리 말로 가르친다 한들
어찌 자신이 그걸 알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러니 세존의 제자들이 오로지 거짓으로만 안식에 이르거나
겉으로만 해탈을 말할 뿐 실제로는 그 가르침에
계속하여 자아가 커지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까 두렵다한다.
이제 세존은 싯다르타를 똑똑하다하며
대신 너무 지나치게 똑똑한 것에 조심하라 말씀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떠나간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이 온화하고 완성된 자의 미소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뭔가 세존이 분명 위인 것은 맞다만 싯다르타도 참 범상치 않다.
말뿐인 가르침은 아무 소용없으니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고 하니 말이다.
실천 없는 가르침이 오히려 자아가
커지는 방향이라니 이도 역시 그렇다.
우리도 많은 공부를 하며 살아오지만
그중 말뿐인 가르침이 거의 대다수 아니던가.
그 중 하나라도 스파크가 튀어 체득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게 힘들어서 배운것에 비해
변화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생각한다.
그러니 싯다르타에게도 아마 이날 세존께 들은 법문이
스파크가 되지 못했나보다 생각한다.
아상을 버려야하는데 체득되지 않는 가르침만이 무성하다니
자신의 이야기는 되지 않고 온갖 편견들로만 가득 차는 것이다.
이래야 해 저래야 해는 참 많은데 내 것은 하나도 없으니
오직 편협한 사고로만 이어지고 아상만 가득할 뿐이다.
그것을 싯다르타는 두려워한 것이 아닐까.
내 생각 4
앞전에 사문을 떠나려고 마음먹었을 때 싯다르타가 이런 말을 했다.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앎의 적은 없다’
나는 이게 도통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보니 나에게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 번째 해석은
‘알려고하는 의지’의 앎은 그야말로 지식인 것이고
‘앎의 적’에서 앎은 체득된 지혜인 것이다.
즉 가르침만을 계속하여 배우고자 하다가
결국 체득하지는 못하니 이것이 알고자 하는 의지가
가져온 앎에 대한 사악한 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고 알려고 하는 의지를 내긴 하는데
실천 없이 계속되는 앎은 결국 지혜의 사악한 적이라는 것이다.
맹목적인 지식의 탐구는 지혜의 체득에 큰 적이다.
내 두 번째 해석은
이 이야기의 세존의 말씀처럼 너무 지나치게
똑똑하려 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자아를 형성하는 모든 것의 원인을 알고자했다.
그래야 아트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르침 보다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그것을 체득하고자 했던 것은
참 똑똑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똑똑하려한다는 것이다.
먼저 가보신 분의 가르침도 받고 체험도 하고 그랬으면 좋을 것을
스스로 스승 없이 또 다른 붓다가 되고자하는 위험성이다.
지식과 체험이 균형을 이뤄야하는데 좀 힘든 길을 가는 듯하다.
스승이 없었던 때라면 모를까 스승이 나타났다면
자신은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될 것을
스스로 체득하고자 한 것에 대한 세존의 경고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도 세존께서는 매우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이는 싯다르타가 결국은 바른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의미 아닐까.
돌고 돌아 해 볼만큼 해 보고나면 돌아오겠지.
시켜도 가기가 어려운 구도의 길인데
안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해보겠다는 싯다르타에게
세존께서 어찌 아빠미소를 짓지 않을 수 있나 싶다.
'생각하는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0) | 2022.11.23 |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독후감 2부 (0) | 2022.11.22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독후감 2부 (0) | 2022.11.20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독후감 1부 (0) | 2022.11.19 |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독후감 (0) | 2022.11.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