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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독후감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독후감

by 생각하는 남자 2022.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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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독후감

 

 

1

 

 

줄거리

 

글은 베르테르라는 청년이

그의 오랜 친구에게 쓰는 편지형식으로 되어있었다.

 

베르테르는 어느 산간마을에 들어간다.

글체를 보니 굉장히 감수성이 뛰어난 청년 같다.

 

처음엔 산과 여러 자연물에 대한 감상을

편지로 쓰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다 마을 무도회에서

로테라는 여인을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동생들을

정성껏 돌보며 사는 여인이다.

 

그 무도회를 계기로 계속하여 로테를 사랑하게 되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친구에게 보내는 베르테르.

 

로테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도

통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계속하여 로테에게 접근하고 사랑한다.

 

그 와중에 약혼자 알베르트가 돌아오게 되었고,

베르테르는 깊은 근심과 좌절감에 빠진다.

자격지심도 있는 듯 하고 질투도 있다.

 

어느 날은 알베르트와 친분을 맺고 논쟁을 하다

말다툼까지 이어지고는 했다.

그 과정에서도 로테와 알베르트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베르테르.

 

이렇게 알베르트와 로테 사이에서 괴로워만 하던 베르테르는

그곳을 떠나 여행을 가기로 결심하여

그 둘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난다.

 

 

내생각

 

 

1부는 일단 스토리가 그렇게 다양하기 보단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가 로테를 향해 사랑을 찬탄하는

내용이 주로 편지의 내용을 채웠다.

 

그러니 스토리보다는 그의 마음을 따라가 보려한다.

나는 얼마나 그의 로테에 대한 사랑과 찬탄에 공감하는가.

  

우선 첫번째. 그가 쪼잔 해지는 것에서 공감을 했다.

베르테르는 그녀와 춤을 추다가 오렌지를

그녀가 어느 부인에게 나눠줄 때마다

그게 자신이 침을 맞은 듯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 이외에 누군가와 춤추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두 번째. 베르테르의 눈에 오로지 로테만 보이는 현상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있지만

보이는 건 로테뿐 아무도 아니다.

 

세 번째로 공감 가는 것이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진 이후로

편지에 내용이 입만 열면 로테였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베르테르가 한 말이 공감이 갔다.

손가락만 마주쳐도 온 혈관이 다 뛰는 것 같은 느낌이란다.

 

길거리 연인들이 손잡고 다니고 그러는 게 풍기문란처럼 보이는가.

내 경험상 그런 감정을 느껴볼 수 있었다는 건

그 시기에나 올 수 있는 매우 큰 행운이다.

그들이 행운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예쁘게 봐주는 게 좋다.

 

다섯 번째로 베르테르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매우 자부심을 느끼는 일이라고 했다.

이유는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는 일이니까.

 

여섯 번째로 자석 산의 비유가 공감이 갔다.

베르테르는 로테 근처에만 가도

그녀를 느낄 수 있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이처럼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언행은 기이하다면 기이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에 빠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중에 독후감을 쓰겠지만

'알렝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라는 책에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이 잘 나온다.

 

간략히 적자면 이러하다.

사랑에 빠지면 '우상화'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그림으로 만들고

정말로 그런 것 처럼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현실과 동떨어진 나의 상상일 뿐이다.

그러니 현실을 마주할수록 점점 그 상상에 집착하게 되고 

이로인해 괴로움과 다툼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베르테르는 사랑에 빠진 것이고,

지금 충분히 우상화를 진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이제 과연 현실과 마주한 상태에서

베르테르는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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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줄거리 

 

로테를 떠나 여행도 하고 일자리를 알아봐

일에도 몰두해보는 베르테르.

하지만 만사가 불만이고 까칠해지는 듯하다.

일하면 그녀를 잊을 수 있을까. 

전쟁터에 나가면 잊을 수 있을까.

 

결국 돌고 돌아 다시금

그녀 곁으로 돌아가게 되는 베르테르.

 

하지만 자신 몰래 결혼식을 올린 로테와 알베르트.

이루고 싶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슬픔과 고통이 극에 다다른다.

 

갈팡질팡 갈팡질팡 죽음을 암시하는 말도 하고

로테도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알베르트에게 권총을 빌려 자살.

이로서 소설이 끝나게 된다.

 

내 생각

 

그의 슬픔은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불치병이 생긴 슬픔.

아무도 몰라주는 것에 대한 슬픔.

세상에 홀로인 것 같은 슬픔.

이 모든 게 내 탓 인 것만 같은 슬픔

슬픔 슬픔 슬픔 자살....

 

보통 보여 지는 모습에서만 의미를 찾기 일수이다.

하지만 내가 의미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위 하나하나는 때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의미를 가질 때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찾은 의미나 힐링은 본인들 외에는 모른다.

공감할 수 없는 타인의 행동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

또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가.

내가 찾은 의미가 아니면 모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가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성지순례에 가는 자들의

길 한걸음 한걸음은 진통제 하나하나다.

그런 것들을 망상이라 하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미망인에 대한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살인을 저지른

한 머슴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하며

그의 행동에서 정당성을 찾기도 한다.

 

그만큼 통제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슬픔이다.

누구도 아닌 내 몸과 마음인데

통제할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아 사랑 자체가 무섭다기 보다는

소유욕 독점욕이라는 사랑의 특성이 무섭구나.

사랑도 하나의 욕망이라 하는데

이 욕망이 다른 욕망을 불러들이면서

겉잡을 수 없이 무서워지는 구나.

 

불륜과 질투로 칼부림 나는 일의 이유가 뭔가.

왜 사랑하는데 칼부림을 하게 되나.

그것은 사랑에 독점욕, 소유욕, 질투와 같은 것들이

달라붙으면서 생기는 것들이구나.

 

그리고 이것은 일대일의 사랑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인간 사랑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나도 지극히 이런 인간 중 하나라 같은 상황에서

독점욕 소유욕 질투 같은 게

올라온다면 다르지 않을 수 도 있겠구나.

 

왜 욕망을 조심하라고 하는가.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데 그러는 걸까.

그건 사랑의 본질이 욕망이라 그렇기도 하고

욕망이란 것은 그 개별적인 것으로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른 욕망과 만났을 때 폭발적으로

위험하게 될 수가 있기 때문 아닐까.

 

물욕이 성욕을 만났을 때,

명예욕이 물욕을 만났을 때,

성욕이 명예욕과 만났을 때 등등....

 

그에반해 베르테르의 사랑이

슬프지만 숭고해 보이는 이유는

희생과 인내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망인을 사랑한 머슴은 상대를 죽이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에 비해 베르테르는 결국 자신의 피를

보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

 

수 도 없이 많은 질투를 했지만

알베르트를 죽인 것도 아니었고,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것에 대한 증오로

로테를 죽인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죽어야 끝나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자각한

베르테르의 선택이 자살이라면

이게 최선이었는지 모른다.

 

베르테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꼭 죽었어야 했나 어쨌냐 하는 말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함부로 비판적으로 보면 안 된다.

 

그의 행보를 보면 정말 오랜 기간을 자제하고 인고하며

그녀 곁을 맴도는 일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를 차지할

희망이 없다는 것에 체념한 것이다.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살의 계기는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약혼자가 있다는 것 까지는 어떻게든 희망을 품고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 같은데

결혼식을 올렸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거의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이 삶을 이어가는

중요한 요소가 희망이라는 것이라 생각한다.

믿음과 사랑과 희망 중에 무엇이 제일?

모르긴 몰라도 희망이 없으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다.

 

다시 해석해보면 베르테르의 슬픔은

사랑을 못 이룬 것에 대한 슬픔에

희망이 사라진 것에 대한 슬픔이 더해졌다고 볼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살아가기 위한 희망찬 얘기이다.

 

 

내 생각 2

 

 

자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로테를 찾아가 시집을 읽어주고

강제 키스와 포옹을 한 후 말로는

다신 안 만날 것이라 했지만

짠하게 바라보는 로테와 떠나는 베르테르.

 

그리고 자살 후 그림 속에 나타난

베르테르의 방안 모습을 보며

한동안 가슴속에 먹먹함이 있었다.

 

방안에는 오직 로테의 실루엣이 있는 액자뿐이었다.

그냥 그뿐이라는 사실이 먹먹하게 만들었다.

 

뭐 혹자는 베르테르의 땡깡이니 뭐니 하면서

그런 식으로 자살을 하면 얼마나 민폐니 하는데

얼마나 민폐 끼치지 않고 사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으면

때로는 정말 청승이다 싶고 때로는 고만해라 싶고

때로는 정말 징하다 싶고 때로는 민폐다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얘기가 되질 않을 것 같다.

어디 청승 아니고 징하지 않고 민폐 끼치지 않는 사랑을

사랑이야기라며 꺼내들고 올 수 있을까.

 

책을 통해 사랑이 얼마나 징한것이고

민폐스러운 것인지도 볼 수 있는 거고

때로는 청승맞고 어린애처럼 땡깡도 부리고 싶은 게 사랑이라는

그런 사랑의 특성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사랑의 장난이다.

로테도 그 정도면 친절했고

알베르트가 로테의 운명이었을 뿐이다.

 

둘의 운명의 한가운데에 다른 운명이 개입했을 뿐이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지독한 운명이.

사랑은 병이다.

그리고 베르테르의 사랑은 불치병이다.

 

차라리 남 탓을 한다면 괴로움이 반으로 줄 텐데

자학이 유별나게 심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로테라는 여인에게 걸린

사랑이라는 불치병을 통해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리석음이니 뭐니

선악의 잣대는 들이대고 싶지 않다.

사랑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지

이런 베르테르의 행위에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건 너무 잔인하다.

 

사랑은 사랑하는 순간 그 자체로 행복이다.

그래서 뭐 그녀를 위해 다 해줄 수 있느냐

어쨌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순간이 행복인 것인데

그러지 못하니 불행해져서 자살한 것이다.

 

마음껏 하고 싶은 사랑을 하며 사는 삶은 얼마나 복된 삶인가.

사랑하면 밥 먹여 주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똑같이 밥 먹는다고 다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인간에게 주어진 행복 중에

그 자체로 행복한 게 얼마나 있을까.

 

참고

 

책을 다 읽고 나니 자꾸만 올라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주제로한 영화나 뮤지컬이 없냐하는 것이었다.

이 슬픈 사랑이야기를 시청각으로 느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검색하다보니 유튜브에서 뮤지컬과 함께

이 책을 분석한 강의가 몇 개 올라오는 걸 보았다.

대략적으로 이런 얘기였다.

 

당시 책이 써진 18세기는 기존의 경건주의와

새로운 합리주의간의 충돌이 있던 시기라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종교적인 금욕주의 같은 그런 것이고

합리주의는 뭐 이성적인 판단 같은 걸 중시하는 것.

 

그런 면에서 알베르트라는 인물이 이해가 되었다.

책에 빠져서 볼 때는 거참 사람 까탈스럽네

비인간적이네 하며 봤지만 시대적인 배경으로 보아

그런 시대의 흐름에 따라간 인물인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베르테르는 경건주의에도 낄 수 없고,

합리주의에도 낄 수 없는

금욕적인 사랑이라는 걸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또 그런 면에서

그의 갈등이나 고뇌가 또 이해가 된다.

 

요즘 같으면야 조금만 뻔뻔하면

욕한바가지 먹고 불륜을 하거나

자유로운 영혼이라며 살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즉 용납 혹은 용서될 수 없는 죄악과 같은 것을

막 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가슴에서 올라오니

그는 뒷걸음질을 계속 치다 결국 자살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살도 경건주의에 입장에선

용납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

그의 장례식엔 성직자들이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봐서야 그렇구나하며 보고 있지만

당시의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건

슬픔 그 이상의 괴로움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당시에 많은 남자들이

이런 것에 동조하고 공감했다니

이전까지의 사상이나 시대는 이미 뒷전으로 물러가려고 하는

징조가 보이는 그런 격동의 시기였나보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 간통죄가 사라졌다.

아직 정서적으로는 용납되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한건 사람의 감정이나 마음은

법률이나 금기로 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만 지금 내가

우리나라 법이나 사회적 통념 속에서

많이 어긋나거나 용납되어지지 않을 만큼의

감정 선을 갖고 있지 않을 뿐이지

베르테르가 될 수 있는 요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도 선택이고, 결혼도 선택이고, 

출산도 선택인 시대적 흐름 속에

있으니 망정이지 뭐 하나라도 강요되거나 했다면

멘탈이 약한 내가 자살하지 말란 법 있나.

 

시대가 용서하지 않은 사랑에 빠져

벼랑 끝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던 베르테르가

그 마지막 선택마저 경건주의 때문에

축복받지 못하다니 그저 슬플 따름이다.

감정과 이성의 다툼은 그 자체로 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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