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독후감 5부
6장 야곱의 싸움
줄거리
피스토리우스를 만난 후
싱클레어에게는 계속된 변화가 일어난다.
그와의 대화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이 알을 깨고
나오도록 도와주는 망치질이 되었다.
그러던 중 자신을 따르는 친구도 만나게 된다.
이 친구는 마치 어렸을 때 자신이 그랬듯이
금기를 얘기하면서 혼란스러워 했고
결국 싱클레어의 말을 듣고 따르는 친구가 되었다.
그 후 싱클레어는 계속 꿈을 꾸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나이가 있지도 않고,
단호하면서도 의지가있는
그런 영상을한 사람이 계속하여 꿈에 나타났다.
그러던 어느 날은 자신이 배우고 따르던 피스토리우스에게
반항 아닌 반항을 하게 된다.
피스토리우스나 그의 가르침이나
모두 골동품처럼 느꼈다는 것이다.
싱클레어에겐 이제 피스토리우스도 결
국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체 살아가는 골동품같이 보였다.
그리고 결국 가르쳐준 분에 대한 죄송함은 가득했지만
스승을 떠났고 스승도 그를 자연스럽게 보내주었다.
내 생각
싱클레어는 성장했고,
피스토리우스는 더 이상 그를 가르치기엔
버거운 그릇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배은망덕이나 배신으로 보이지 않았고
더 높이 날고자하는 새와 그런 이를
품안에서 보내는 어미새 처럼 보였다.
이런 것을 두고 아름다운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노래의 제목이나 구절에서
수많은 아름다운 이별을 들었지만
청승이나 징징도 아닌 이런 이별이 진정 아름답게 보인다.
품을 떠나는 새끼 새도 어미의 마음을 알고
어미 새도 떠나는 새끼 새의 마음을 아는 상황에
더 큰 도약을 위한 이별은 결코 슬픔이 아니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성장하는 싱클레어를 보고 느끼는 바가 있다.
마치 스승 피스토리우스를 배은망덕하게 꼬집고 돌아선 것 같지만
나는 그것을 싸울 줄 아는 면모라고 보았다.
싱클레어는 싸움닭 기질이 있다.
피스토리우스는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 속에 없는 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못한다.'
나도 어렴풋이 안다. 나를 자극하는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뇌해야한다.
자신이 내키지 않는 문제는 숨기지 않고 제시하고
그것이 풀리지 않는다면 계속하여 구도의 길을 가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열 살부터 참 어려보이기만 했고
데미안을 거쳐 피스토리우스까지
여러 방황과 인도자를 마주하며
보이는 모습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고뇌하는 모습이다.
세상사에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들과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두고
떠들거나 말거나 살던 대로 살련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답을 구한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렇게 구도의 길을 가는 자 앞에는
늘 인도자가 있었으니 이것이
구도의 길을 가는 자에게 오는 행운인가 싶다.
구하지 않는 자에겐 인도자도 없다.
7장 에바부인
줄거리
대학에 간 싱클레어.
대학교의 생활이 그다지 흥미 있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꿈에 계속하여 나타난 영상을 떠올려본다.
방학 때 우연히 전에 데미안이 살던 집 근처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한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앨범을 통해 데미안 어머니를 보게 된다.
그런데 꿈속에 나타나던 영상 속 여인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그 후 대학에서 우연히 데미안을 만나게 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인도하여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초대한다.
어렸을 때 성탄절을 기다리던 어린 아이마냥
데미안의 집으로 초대 된 싱클레어는 기쁘고 설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동안 어려서부터 데미안에게 들어온 자신의 얘기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이어나가고 계속하여 그 집에 드나들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게 되는 싱클레어.
그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 했지만
모두가 구도자였다.
이마에 표식이 있는 카인과 같은 그런 구도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침잠에든 데미안은
마치 전쟁을 암시하는 듯 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싱클레어에게 말해주게 된다.
내 생각 1
대학에 간 싱클레어의 반응이 매우 인상적이다.
같은 대학생들의 말이나 생각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강의들 모두가 그에겐 재미없다.
하나같이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사상들을
주입시키는 것에 그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럴 법 하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모두 각자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전부 다를 수 있는데
하나같이 획일화된 교육 속에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싱클레어는 어느덧 그런 것이
재미없는 수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인도자도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재미없는 얘길 재밌게 들어야하니 말이다.
왜 운전면허 딸 때 남편에게 가르침을 받지 말라는 말이 있을까.
그것은 그만큼 인도라는 것이
지식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도자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의
덕성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지식보다 더 갖추기 어려운 것이라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아마 훌륭한 인도자가 훌륭한 학자보다는 드물지 않을까.
내 생각 2
대학에서 만난 데미안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패거리 문화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한다.
이 비판에 대핸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유년시절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만큼 모두가 그 나이 때에 마치 관례라도 되는 듯이
하나씩 손을 대기 시작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늘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운명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그런 준비가 바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유행에 술문화에 종교에 뭐에 소속되어 지면서
어느덧 자신은 잃어버리게 돼버리는 일은
운명을 뒤로하고 군중 속으로의 도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또 열 살수준의 질문을 던져야할까.
‘그렇다고 유행에 막 뒤처지고
종교도 갖지 말고 혼자 살란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라는 뜻이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면깊이 들어가 보기도 전부터
맹목적으로 유행을 따라하고
패거리문화를 따라가는 일을 그만두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은 사람은
싱클레어처럼 기존에 자신이
그렇게 의지하고자 했던 것들로부터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패거리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에 익숙한 싱클레어가
구도의 길을 가기에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사회 부적응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혼자 노는 게 좋아서 공동체를 포기 한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엔 패거리문화라도 접하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러니 패거리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의미 있다는 것은
구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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