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독후감 3부
3.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줄거리
오랜 기간이 흘러 다시 데미안을 만났다.
이때 주인공은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할 사춘기였나보다.
그리고 이제 집에서의 밝은 세계나
성경 공부하는 시간에 신부님의 말씀은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이때 데미안은 성경에 나오는 이런 저런 금기에 대해
주인공에게 새로운 해석을 한다.
이를 태면 예수 옆에 함께 매달려 죽은 도둑의 이야기가
도둑들을 포교하기 위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
마침 주인공도 온갖 금기사항들을 교리시간에 배우지만 전혀 와 닿지 않았고
자신이 참고 있는 성욕과 교리에서 말하는 금기 간의 모순을 생각했다.
어느덧 주인공의 방학이 끝나며 다른 학교로 가기로 했고
데미안은 여행을 떠났다.
이 시기를 지난 주인공은 더 이상 그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의 밝은 세계는 더 이상 그에게 흥미가 없었다.
내 생각
우선 2장에서 카인과 아벨에 대한 데미안의 새로운 해석이 나왔었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인과 아벨을 검색해서 공부해보니 알 수가 있었다.
성경에는 카인과 아벨 형제가 나오는데 카인은 농장을 운영하며
곡물을 예수에게 바쳤고 아벨은 양치기를 하며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가 아벨의 것만을 기뻐하며 받았고
화가 난 카인이 아벨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그 후 예수는 카인의 이마에 표식을 해 사람들이 죽이지 않게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데미안이 새롭게 해석하기로는 이렇다.
원래 카인은 강한 존재였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를 어찌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그러지 못하는 인간들이
일부러 표식 이야기를 꾸며내어 카인을 견제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예수의 예쁨을 받는 아벨과 같은 존재라 생각했던 주인공.
한순간 어둠의 세계에 빠져들어 카인과 같은 존재가 된 주인공에게
뭔가 혼란을 겪게하는 새로운 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3장에선 예수와 함께 매달려 죽은 두 도둑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한다.
매우 흥미롭고 통쾌했다.
물론 성경에 대한 모독이니 뭐니 할 수 도 있고
내가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대다수이니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된다.
그러니 성경이 맞고 틀리고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 없는 믿음이 가져오는 인과가 어떤지를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데미안의 그 해석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얼마나 생각이 트여있는 사람인가.
그러면서 내게 그 정점을 찍은 말이 이것이다.
‘똑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성경이든 뭐든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나의 이야기 이긴 한 건가.
성욕이 올라오는 사춘기 아이에게 온갖 금기에 대한 이야기가
과연 나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나로부터 멀어지는 일인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사회규범이나 규율에 맞게 해석을 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은 매우 편한 일이다.
몸이 편한 게 아니라 생각하기가 편하다.
그저 생각이 편할 뿐 그 속에 나는 없다.
그리고 그 생각들에 순응해 살수록 점점 더 나와는 멀어진다.
내가 애초에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 어떤 것을 접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비판이 사라지고 틀을 따라 가는 일은 그저 편함을 추구하는 것일 뿐
나를 찾아가는 여행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 사람을 죽이고 성관계를 막 하라는 뜻인가?
그게 아니라 데미안이 의도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자신에게 솔직해 지라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똑똑한 이야기들은 결코 똑똑하지 못하다는 뜻이며
틀을 깨려는 노력이 부단히 이뤄지는 삶을 살아가라는 충고이다.
주인공은 어느덧 알아가고 있었다.
금기에 대한 고민, 즉 어두운 세계에 대한 고민이 비단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문제라는 것을.
불량학생으로 처음 시작 되어 데미안으로 인해 해결된 것 같은 현실이었지만
사춘기인 지금은 그것이 불량학생에서 금기라고 하는 것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문제가 해결 된 것이 아니라 옮겨왔을 뿐이다.
모든 괴로운 고민은 어둠에서 온다.
탐하는 마음이든, 어리석음이든, 성남이든 모두 어두운 마음이다.
그리고 이게 모두의 문제이다.
*
여기에서 예수 옆에 매달린 두 도둑의 해석이 가슴을 친다.
예수는 왜 이 모든 어두운 세계에 대한 것을
온갖 금기들로 명시하고 악마에게 책임을 전가하는가.
세상의 밝은 부분이 반이라면 어두운 부분도 반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는 세상의 반을 외면하는 것 아닌가.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역시 성경을 모르는 내가 함부로 예수를 비난하고
그러는 것을 조심스럽게 여긴다.
그러니 저 해석에 대한 시비를 따지기 보다는
밝은 세계와 대비되는 어두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만 집중하고자 한다.
초등학생의 눈에 밝고 어두운 것의 차이는 다만 환경적인 것이었을지 모른다.
잘 먹고 잘 배우고 그런 세상은 밝은 세상,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의 세상은 어두운 세상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금기에 대한 외면은 그런 부분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욕구적인 문제나,
분심과 같은 것들로 어두워지는 것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부유한 환경에 살면서도 그곳이 예전과 다르게
어두워지는 현상을 그밖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을 단순히 금기라고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해결이 될 수 있을까.
탐욕이든 분노든 모두 사람의 마음이다.
밝고 어두운 명암의 차이로 나누는 것도
어찌 보면 차별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밝은 것은 좋은 것,
어두운 것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이미 너무 깊게 자리 잡고 있지 않나.
저런 것들을 어두운 것, 바르지 않은 것으로 나누기 때문에
더욱 더 그것들을 외면하고 멀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접근해야 여실히 볼 수 있다.
어차피 밝은 세계든 어두운 세계든 모두 이 세계 아닌가.
똑똑한 말 하지 말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내 안에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두려움이라면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
분노라면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
내안의 이 문제는 모든 사람의 문제이다.
그러니 그것을 금기시 하지 말아야한다.
들어내고 까고 까내서 들여다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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