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독후감
4장 베아트리체
줄거리
싱클레어는 학교를 옮긴 후 도시생활을 하게 되는데,
한 친구를 만난 이후로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술도 마치고 싸움도 하고 퇴학의 위기까지 몰린다.
어렸을 때 느꼈던 어두운 세계에 다시 들어가는 듯 하던 그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의 외모에 쏙 반하게 된다.
정결해보이고 강인해보이기도 하게
생긴 그 소녀를 동경하게 된다.
그는 그녀를 베아트리체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 이후 방탕한 생활에서
다시 돌아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녀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지만 어느덧 완성된 그림에는
그녀의 모습보다는 데미안의 모습이 보이게 된다.
그 영상은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나이가 없는 것 같기도,
의지가 굳세면서도 몽상적이고,
굳어 보이면서도 생명력이 넘쳤다.
싱크레어는 갑자기 떠오른 옛친구 데미안을 생각하다
어릴 적 데미안이 인상적이라고 했던
자신의 집 현관문에 그려졌던
문장을 떠올려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은 지상에서
알을 깨고 나오려는 매의 형상이었다.
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줄거리
싱클레어는 용기를 내어 데미안에게 그 문장을 보냈다.
그 후 데미안으로부터 쪽지가 왔고
그 쪽지 안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이 말에 큰 울림을 받고 대체 압락사스가
어떤 존재인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직적인 것을 지닌 신성이라는
정도만 안 상태로 이를 찾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그러다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되고
그와의 대화는 마치 스승과 제자처럼
싱클레어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모든 대화들이 자신이 알에서 깨어
나오도록 망치질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내 생각
나는 싱클레어가 했던 말 중에서 드디어
알을 깨고 나오는 구나 싶었던 말이 있었다.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더 이상 사랑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어려서는 금기이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사랑.
그 두려움의 대상이 이제는 두렵지가 않다.
그런 척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두렵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싱클레어를 이렇게 보고 있으면 그의 두려움이
결코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이 금기인 것은 같은데
왜 그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지금은 그렇지 않을까.
금기였던 게 금기가 아닌 것이 된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을 뿐이다.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일상 속에 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지 않는 한
금기는 늘 금기이고 두려움은
늘 두려움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변화.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고정관념과 집착이라는 알을 깨고 나오면서 부터이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변화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는 것은
결코 나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외부의 변화로 가져오는 나의 변화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이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생각으로는
알을 깨고나올 수 없다.
알을 깬다는 것은 내 안의 것을 깬다는 것이지
함부로 주변 사람을 변화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억압이고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생각 2
피스토리우스는 이런 말은 한다.
‘내 안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냥 간직하고 있는 것은 큰 차이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싱클레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나 바라보는 세상의 현상들이
모두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고 있다는 것을.
피스토리우스도 말한다.
이미 인간의 내면에는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그런데 그걸 아는 것이 왜 그렇게 큰 차이를 낳는 것일까.
난 그것을 투쟁하는 자와 아닌 자의 차이를 낳는다고 보았다.
내 안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나보고 세상 모든 것을 만들어보라는
그런 식의 해석이 아니다.
아는 자는 계속하여 투쟁 할 것이고,
모르는 자는 투쟁을 멈출 것이다.
그래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차이가 크다고 생각한다.
신을 믿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큰 것과 비슷하다.
신의 존재가 있다면 믿고 없다면 안 믿을 것인가.
어차피 있고 없고를 떠나 믿고 가는 것과
안 믿고 가는 것은 추후에 큰 차이를 낳을 것이다.
뭔가를 시작하면 똑같이 시작해도
왜 꾸준하거나 그렇지 못 하거나의 차이를 낳을까.
잘해보겠다고 시작했는데 왜 중간에 시들해지는 것일까.
내가 그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면서
서서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내 안에 세상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렇다는 걸 알고 가는 자와 아닌 자는
투쟁하는 자와 의지하는 자의 차이를 낳을 것이다.
의지하는 길을 간다면 10살의 싱클레어가 세상의
절반인 어두운 면을 두려워했듯이
계속하여 밝은 세계만을 추구할 것이고
죽을 때 까지 세상의 절반이
두려운 채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싱클레어가 부모에게 의지했다가 식상함을 느끼고,
베아트리체에 의지했다가
다시금 식상함을 느끼는 것처럼.
내가 지금 투쟁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이미 뭔가에 의지하며 살고 있을 것이고
그 뭔가는 다시금 나를 식상하게 만들 것이다.
나의 삶은 식상한가.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하다.
의지할 때는 그렇고 투쟁할 때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건 세상이 변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내안에 있는 문제다.
내 삶이 식상해지려 할 때면 늘 나에게 물어봐야한다.
지금 투쟁하고 있는가.
'생각하는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르만 헤세' 데미안 독후감 6부 (0) | 2022.11.15 |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독후감 5부 (0) | 2022.11.15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독후감 3부 (0) | 2022.11.14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독후감 2부 (0) | 2022.11.13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독후감 1부 (0) | 2022.11.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