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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독후감

'헤르만 헤세' 데미안 독후감 6부

by 생각하는 남자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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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독후감 6부

 

8장 종말의 시작

 

줄거리 

 

전쟁은 정말로 일어났다.

각자 징집된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전쟁터로 갔고

 

어느 겨울 피를 흘리며

군병원에 있던 싱클레어는

우연히 옆 침상에 누워있는

데미안을 발견하게 된다.

 

데미안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 후

둘은 키스를 나누고

이 키스는 데미안을 통해

곧 에바부인과의 키스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옆에 데미안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 볼 때면

그 안에서 어두운 거울을 통해

데미안을 볼 수 있었다.

어느덧 싱클레어는 자신 속의

뛰어난 존재와 하나 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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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내가 생각했던 그런 결말은 아니었다.

계속될 것 같았던 에바부인과 데미안과의 만남

그리고 그 안에서의 연대가 전쟁으로 흩어지다니...

 

하지만 그 운명을 피하지 않고

맞이하는 자세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 해준다.

 

운명을 맞이하고 또 다른 운명을 맞이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의 끝을 향해

계속하여 현재의 운명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도 지금의 운명에 집착하는 경향이 짙다.

평화로운 지금의 상황이 언제나 계속되길

늘 무탈하게 지내길....

 

나는 이들의 운명을 대하는 자세에서

준비라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음에 올 운명을 준비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마 결말이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혹은 해피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보기에 데미안에서의 결말은

그저 인간의 현실이고 운명이었다.

 

그 시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과 운명 속에서 결말을 맞이한 것뿐이다.

 

다만 준비를 했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이들에게 나타난다.

 

데미안의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운명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

운명을 뒤로하고 패거리를 따라가는 사람.

 

나에게 데미안의 결말이 어땠느냐고 물어본다면

해피엔딩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앞으로

어떤 역경이 오게 될지 모르지만

준비된 상태로 그 자리에 서있기 위해 공부할 것이다.

 

참고자료

 

계속 꿈에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영상을 보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내안에 세상이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찾아보았다.

 

이런 발상은 의 철학에 기반 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진짜가 있는데

융은 이를 자기라 부른다.

 

이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의 소리를 함께 듣는 나,

양자의 유용한 교환관계를 수행하는

온전한 나를 가리킨다.

 

융에서 자아는 페르소나라는

개념과도 연결되는데,

이는 개성이라 번역될 수도 있지만

가면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예컨대 도덕규범이나 사회적 관례 혹은

양심을 따르는 태도인데

개인은 이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인격의 다른 부분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때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 꿈에서 페르소나에 반하는

영상이 출현하여 정신건강을 회복하려 들기 때문에

이런 꿈의 영상 혹은 무의식의

표현물이 융에의해 그림자로 불리곤 한다.

 

더 나아가 이 그림자는

아니마/아니무스 개념과도

어느 정도 동일 시 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둥근 공 모양으로 머리와 목이 두 개,

팔과 다리가 네 개씩 달려있었으나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두 개로 나뉘었다.

 

그 이후로 인간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완전성을 회복하려고 하는데,

완전하게 되려는 이 마음이

바로 사랑의 근본을 이룬다.

 

융에 의하면 개개인의 무의식에는

이상화된 자신의 반대성을 획득하려는 충동이 있고

이는 완성에의 욕구, 달리말해 자기

발견하려는 욕구와 결부되어있다.

 

이때 무의식의 이상화된 이성 상은

물론 개인적인 체험에 영향을 받겠지만

집단적 무의식에서도

강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싱클레어의

꿈에 나타난 영상이 이해가 된다.

 

*

사람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있지만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쓰고

사회 규범 속에서 살아가는 내가 겪는 내면의 충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꿈의 영상 속에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

정신건강을 회복하려는 것이라니

거참 정신이 엄청 피곤하겠다 싶었다.

 

내 정신이 원하는 것은 정말 수도 없이 많은데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려하니 억제하는 게 얼마나 많고

그만큼 얼마나 피곤하면

꿈에서라도 그걸 회복하려하는가.

 

꿈에서라도 실컷 욕해주고 때려주고 싶은 그걸

금기하고 참고 사느라

얼마나 힘든 게 인간이라는 건가.

다시금 나를 돌아보게 된다.

 

화가 나는 순간에 그 사람들을 어찌하지 못해서

죽이고 싶고 패고 싶고 하는 그런 것들을

현실에서 해소하지 못하고 사느라

얼마나 정신이 건강하지 못했나.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착한생각으로 가득하고 밝은 생각으로 가득한 게

정신이 건강한 사람의 상태 아닐까.

 

하지만 융의 철학대로라면

불평불만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꿈에서라도 불만이 표출되는 존재이다.

태생적 구조가 참기만 해서는 버틸 수 없는 존재이다.

 

가슴속에서 막 끓어오르는 데 그걸 어찌 참나.

분노가 끓어오르고, 욕망이 끓어오르고,

질투, 시기, 이런 게 막 끓어오르는데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참지 말고 깊숙이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참아야 한다는 것도 집착이고 고정관념이며

그런 방식이 이미 효과가 없다는 것도 스스로 증명된다.

 

나는 전쟁이 터졌을 때 데미안이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것에 너무 의아했었다.

그렇게 바른 소리 잘하던 사람이

전쟁에 뛰어들어 사람을 죽이는 선택을 하다니

이사람 이중인격이야 뭐야.

 

하지만 이제 보니 전쟁이 터졌을 때 큰 불평불만 없이

전장에 뛰어든 데미안의 그런 그의 행동만 보아도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구나 싶다.

 

전쟁도 운명, 전쟁에 뛰어들었다면

죽기보단 죽이는 것이 운명이다.

 

그 상황에 페르소나가 발동하였다면 악몽을 꾸었겠지.

죽이긴 싫은데 죽이라하고 아...정신 피곤해.

 

아무튼 데미안이라는 책은 내게 결론적으로

정신건강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지를

싱클레어와 데미안을 통해

구체적으로 생각 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더불어 운명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준비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를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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