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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독후감

'셰익스피어' 햄릿 줄거리 독후감 2부

by 생각하는 남자 2023.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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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독후감 2부

 

햄릿
햄릿

 

4막 줄거리

 

왕비의 말을 전해들은 왕은

결국 햄릿이 미쳤다 생각하여

영국으로 보낼 결심을 했고 왕의 친서에는

햄릿을 죽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영국으로 가는 길에 오른 햄릿은

노르웨이의 왕자가 폴란드를 치기 위해

가는 것을 보게 되었고 자신의 무뎌지는 마음을

돌아보며 다시 복수심을 다진다.

 

이때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아는 실성해버린다.

그리고 프랑스로 갔던 레어티스도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돌아와

군중을 이끌고 덴마크 왕의 궁전으로 쳐들어오게 된다.

 

왕은 레어티스를 잘 설득해

이 모든 것이 햄릿의 계략임을 말하고,

레어티스와 함께 햄릿을 제거할 계략을 짜게 된다.

 

그것은 검술대회를 열어 레어티스의 검에

독을 묻혀 햄릿을 죽이는 것과

만약을 대비한 독이든 술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한편 오필리아는 물에 빠져 죽게 되었고, 

햄릿은 영국으로 가던 중

해적선에 포로가 된 상황을 적어

친구 호레이쇼에게 전달하며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당장 와주길 청한다.

 

느낀점

 

저 괴물과도 같은 습관은 우리의 악습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천사와 같은 면도 있죠. 

선량한 행실을 빈번하게 행하면 마찬가지로 그것도

새로 맞춘 복장처럼 차츰 몸에 배게 들어주니까요'

 

햄릿이 어머니를 클로디어스에게 보내며 한 말이다.

이제 부터라도 클로디어스와의

잠자리를 하지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왕비는 그 후로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습관. 비슷한 말로 중독이라고 해도 될까.

습관적으로 하는 행위들은 사실 중독성이 있다.

클로디어스와의 잠자리도

뭔가 즐거움을 주니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습관이 썩 즐겁지 않거나 혹은 괴롭다면

그 습관은 오래 유지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렇게 습관은 자연스레 편한 것

혹은 중독되기 좋은 것으로 흐른다.

 

내가 앉아있는 자세도 편한 자세로 앉아 그게 습관이 되고

잘못된 자세는 다시 병을 만들어 내 운명을 바꾼다.

그 후 잘된 자세를 취하는 습관을 들였고

이것이 또 내 운명을 바꿨다.

 

그런데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은 힘겹게 다가온다.

왜냐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운명은 바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중독은 하는 동안에는 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다가 중독의 상황이 끝나면

그때서야 그 불편함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나쁜 습관. 그때는 잘 모른다.

쌓이고 쌓이다 터질 때가 되거나 터져야 그 해악성을 알게 된다.

운명이 화살이 돌고 돌아 나에게 꽂히는 그날

비명을 지를 일이 생기지 않도록

무엇에 중독되어있는 지 찾아야한다.

 

왜냐면 위 대목에서 나오듯 그것이 꼭 내 건강을 해치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정도에서 끝나는 그런

내 생활의 편의를 위한 문제에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사람이 선량하지 못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그러는 지도 모르게 무감각 하게 만드는 일이라

업의 차원에서 다뤄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알고 저지르는 업이 더 많을까

모르고 저지르는 업이 더 많을까.

생각해보면 후자가 훨씬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로 맞춘 복장처럼 차츰 몸에 밴다는 건

처음엔 부대끼지만 알게 모르게 편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 옷이 악마의 옷이라면 생각만 해도 섬뜩한 것이다.

 

5막 줄거리

 

묘지를 파는 광대를 통해

햄릿은 자신이 어떻게 소문났는지를 듣게 된다.

이 때 오필리아의 장례식을 위한 행렬이 등장하고

여기서 레어티스와 햄릿의 싸움이 잠시 벌어진다.

 

햄릿이 영국에서 돌아오게 된 경위는, 

클로디어스 왕의 햄릿을 살해하라는

서신을 발견한 이후 서신을

서신 전달자인 두 친구를 죽이라는 것으로

조작한 이후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결국 검술대회는 열렸고 독살계획을 모르던

어머니는 독이 든 잔을 들며 죽었고,

햄릿은 레어티스에 의해 칼에 찔려 죽게 됐으며,

레어티스도 햄릿이 든 그의 칼에 의해 찔려 죽게 됐다.

마지막으로 클로디어스 왕도 햄릿의 칼에 의해 죽는다.

 

죽어가는 햄릿은 노르웨이왕자

포틴브라스를 덴마크 왕위 계승자로 추천하며

남은 친구 호레이쇼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주기를 부탁한다.

 

느낀점

 

햄릿은 결국 클로디어스를 죽였다.

그렇게 뜸을 들이며 확인하고 또 확인 했지만

치밀하게 계획해서 살인했다기보다는

즉흥적으로 이리 되었다.

 

앞장에서부터 햄릿의 행동은 신중한 듯 보이면서도

그렇게 썩 복수를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아보였다.

마지막 까지 와 보니 클로디어스의 죄가 더 쌓일 때를 기다렸다가

죽이겠다는 계획도 사실은 변명 아니었나 싶을 만큼이다.

 

결과적으로 복수를 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보자면

너무 생각이 많아서 기회를 놓치는 일도 생기고,

스스로도 굉장히 괴로운 그런 류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이런 성격이 형성되었을까를 찾아보니,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말미암은

깊은 우울증의 증세라고도 한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무기력하고

냉소적이고 감정기복이 심하며

행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어머니인 왕비에 대한

실망감으로 충격이 큰 것 까지는 공감을 하며 보았지만

우울증이라고 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결국 햄릿을 통해 나타난 그의 행태들은

모두 외부적으로 처해진 부조리한 상황에 보이는

젊은이의 한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냥 사람이니까 저런 상황에서 화도 나고 복수심도 들고

이런 저런 갈등도 있고 하는 그런 단순한 상황이 아닌

심각한 부조리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병적인 모습인 것이다.

 

햄릿이 아이는 아니지만

유약한 성품인 것만은 맞는 것 같다.

요즘말로하면 멘탈이 약하다고 해야 할까.

 

성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약한 멘탈의 소유자는 그렇게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기가 괴롭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부조리에 맞서며

반항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햄릿의 행동이 그런 반항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멘탈도 약하고 힘도 약하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순간적인 반항일 뿐이다.

멘탈이 강했으면 치밀하게 계획해서 살인을 계획했겠지.

 

햄릿이 어머니에게 험한 말을 내뱉다가 순간적으로

재상을 죽이게 된 일도, 

격한 마지막 장면에서 레어티스와 왕을

죽이게 된 일도 모두 일종의 반항적 행동이라 보인다.

 

그는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를 보며 자신을 비하했었다.

포틴브라스는 자그마한 폴란드 땅이라도 먹으려 결단력 있게

출정하는 반면에 자신은 모든 동기가 확실한 마당에도

이렇게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 한심 해 보이는 것이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의 심리, 반항하는 사람의 심리.

그저 성격 삐뚤어지거나 성격 못된 사람의 모습이라

단정 짓고 넘어가기보다는

그들을 더욱 관심 있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부패와 부조리가 넘치는 이 사회에는

날이 갈수록 반항아들과 우울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햄릿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닌 것이다.

 

*

우유부단하고 갈등이 많던 햄릿도 

5막에서는 결단력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검술시합에 응하지 말라던

친구 호레이쇼의 만류를 대하는 자세가 그렇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초연하게 검술시합에 나가는 것이다.

 

죽음은 하느님의 섭리이니 자신의 죽음도 그렇다며

더 이상 죽은 이후를 두려워하던 햄릿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이건 자신의 죽음 뿐 아니라

모든 이의 죽음이 그렇다는 것 아닌가.

 

이는 결국 자신이 선친의 복수를 위해 클로디어스를 죽인들

그것 역시도 하느님의 섭리라는 뜻이 된다.

클로디어스를 죽이는 것도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인 것이고

자신은 이제 자신의 상황에 집중할 뿐이라는 것이다.

 

햄릿은 이제 복수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

이것은 어째 1막에서 선친이 했던 말대로 되어가는 느낌이다.

복수는 하되 마음을 더럽히진 마라

 

다시 말하면 복수를 하지만

복수에 집착하면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고,

집착하지 않고 행하면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 다는 뜻이다.

 

복수의 문제에 집착하던 햄릿에게

복수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의 문제는 신이 하는 것이고

자신은 더 이상 복수에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을 더럽힌다는 것이 무엇일지 1막에서부터 가지고 오던 의문.

선친은 대체 왜 그런 모순 같은 말을 했던 것일까.

왜 햄릿을 그렇게 시험에 들게 했던 것일까.

 

선친의 의도가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햄릿은 이 일로인해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초탈하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신의 섭리에 따라 죽느냐 사느냐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더 이상 햄릿에겐 죽느냐 사느냐

(to be or not to be)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닌,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로다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희곡 햄릿은 단순한 복수에 대한 갈등과

그 복수를 이루는 그런 차원의 문제를 다룬 책은 아니다.

햄릿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사람의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의 문제를

신의 섭리와 자신의 사적인 집착의

문제로 풀어나간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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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이다.

그리고 비극답게 주인공 햄릿이 결국 죽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 해 본다면

이를 보는 독자들의 마음에는

환희심이 일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기독교신자였다면 햄릿은

신도로서 하나의 롤모델이 될 법하다.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의 뜻에 대해 깊이 생각 해 보지 못하고,

생각 해 보았더라도 그대로 행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신자라고 한다면

햄릿은 신자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다.

 

그런데 과연 햄릿의 희생으로 세상이 좀 바뀌었을까.

그가 과연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죽음과 진실을 세상에 알리라고 했다.

 

포틴브라스가 햄릿의 영향을 받아 잘 했다면 좀 달라졌을 태고,

그렇지 않았다면 다시금 보통의 왕들처럼 했을 태지.

신앙을 위한 희생은 그렇게 생각보다

세상의 큰 변화를 일으키진 못한다.

 

그러니 역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건

비극의 주인공인 햄릿 자신이었던 것 같다.

희생의 공덕은 희생한 사람 자신에게 가장 큰 것 인가보다.

 

사적인 욕심과 집착들로 내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괴로움이 괴로움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일상.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골치 썩으며 살아가는 일상.

 

그 일상에 햄릿이라는 소설은 그래서 어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는 바이블 같은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바이블은 바이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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