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줄거리
슈호프는 러시아의 평범한 농민이었다.
2차 세계 대전에 나갔다가
포로로 잡혀서
간첩으로 누명을 쓰는 바람에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들어와 살고 있다.
지금 8년을 살았고,
이제 2년이 무난히 지나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기상 신호와 함께 새벽 5시에
하루가 시작되었고,
몸이 안 좋은 상태로 일어난다.
슈호프는 이후 자신의 작업반과 함께
눈 덮인 작업장에서
곡괭이질을 하며 추위와 맞섰고
작업 후 아수라장이 된 식당에서도
노련하게 식사량을
더 챙겨 먹게 되기도 했다.
계속 몸이 아파 의무실에가
진단을 받았지만
퇴짜를 맞고 돌아온 슈호프.
반장의 지도하에 오늘은
벽돌 쌓는 일을 하게 되었다.
반장은 일도 잘 하지만
부하들을 많이 아껴서
그의 리드하에 슈호프의 반은
할당량을 채우고도
넘치게 실적을 올린다.
슈호프는 오후에도 열심히 일했다.
누구를 해하거나
빼앗거나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약자를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하루 일과를 잘 마쳤고
숙소에 들어와 하루를 돌아보며
매우 행복한 하루였다고 생각한다.
빵도 그전 보다 많이 먹었고,
국도 두 그릇 먹었고,
영창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렇게 슈호프는 윤년이 낀 3일을 더해
10년 3653일을 수용소에서 보냈다.
내 생각
이 책은 어떤 상상이나
꾸밈이 없는 것 같다.
영화로 치면 ‘1987’ 같은 영화고,
TV 프로그램으로 치면
시사 고발 프로그램 같은 느낌이다.
그냥 저자가 수용소에서 보냈던 세월을
경험 삼아 있는그대로를 고발하는 것이다.
저자 솔제니친은 스탈린 시대에
스탈린을 비판한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8년간 감옥과
수용소 생활을 하고 3년간
강제 추방당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니 이 책이 단 하루의
일기라고 한다면 생생하고도 생생한
그리고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은
디테일한 하루의 일기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역시 살아본 사람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마음먹고 하루의 일기를
중편의 소설로 써 보라 하면
정말 쓸 것도 없을 것 같다.
왜냐면 그날 일어난
일만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꾸밈없이 하루에 일어난 사실만을
쭉 쓰라 하면 정말 쓸 말이 없다.
작가가 더 대단한 것은 또한 이런 면이다.
하루 일과 중 일어난 일에 대한
어떠한 감정적 평가나 소견을 얘기하지 않고
정말 수용소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철저히 고발하는 것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스탈린의 추악함과
권력의 추악함을 노골적으로 짚어서
이것 이것이 스탈린의
나쁜 점이다 말하기 보다는
그렇게 수용소에 억울하게 들어와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생히 고발함으로써
읽는 나 자신이 자연스럽게 작가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그런 화법을 쓰는 듯했다.
그러니까 어떤 못된 부모 아래 사는
불쌍한 아이를 두고
그 부모가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
설명하는 것이 힘들다면
그냥 그 아이가 사는 모습이
이러이러하더라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온 방식대로
이해하기 쉽게 써보자면 이런 식이다.
어느 집에 갔더니 한 아이는
곰팡이 핀 국을 먹고 있었으며,
구더기가 들끓는 빵을 주워 먹고 있었고,
옷은 언제 빨았는지 몰라
역겨운 냄새가 났다.
그 아이 형은 동생의
그 음식마저도 빼앗아 먹었으며,
아이는 병이 걸려 몸이 몹시 아팠지만
형은 아프다는 동생을 시켜
방 청소를 시키고 있었다.
보일러가 틀어지지 않은 방이라
청소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몸이 더워져 살만했다.
그리고 형은 혼자 문 잠그고
나가 놀다 들어온다.
그러함에도 그 아이는
그날 하루 그저 무난히 잘 보냈다고
매우 행복해하더라.
왜냐면 그래도 오늘은
엄마한테 매 맞지 않아서 다행이고
구더기 핀 빵이라도 먹어서 다행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슈호프를 통해
수용소의 하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니 슈호프와 함께
그 안에 있는 많은 수용자들과 간부들,
그들에게서 벌어지는 비열하고
추잡하고 비인간적인 일들을 보며
정말 비열한 인간들이네
추잡한 짓은 혼자 다 하고있네
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건 위에 말한 아이를 보며
추잡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 수용소의 죄수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일로 들어온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며
이 안에서만큼은 스탈린이라고 하는
아버지 밑에서 사는 아이일 뿐이다.
그러니 그 스탈린 수용소의 아이들이
혹한에도 곡괭이질로 몸을 덥히고,
아파도 일을 쉬지 못하며,
한 끼 식사로 빵 200그램을 먹어야 하고
국에는 생선 뼈만 둥둥 떠다니는 데도
좋다고 그 뼈를 빨아대니,
나의 시선은 저절로 당시 그들의 아버지
스탈린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렇게 감정 절제하고
사실을 고발하는 소설은 처음인 것 같은데
사실을 밝히는 일이 왜 중요할까.
왜 작가는 이것이 작가가 추구해야 할
예술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그가 예술의 표현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어떻게’ 에 해당하는 문제를 두고
당대의 형식주의, 상징주의, 추상주의를
비판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예술이랍시고 어떠한 형식이나
상징성을 과하게 부여하게 되면
매우 추장적이고 어려운 표현을 쓰게 되면서
보통 사람들의 가슴에 그렇게 울림을 주기
힘들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냥 직접적으로
이 아이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말하면 되는데,
아버지는 이런 면에서 이렇게 나쁘며,
어머니는 이런 면에서 이렇게 나쁘니
이러 이러한 것은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단순한 현실 고발의 측면에서 나아가
그 현실이 향하고 있는 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소설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아마 그런 측면에서 작자는
슈호프라는 인물을 통해
수용소의 하루를 생생하게 보고하는 것으로서
작품을 썼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랬다더라 하는 사실을
보고 읽는 사람들이 어찌 판단할지는 모르나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위에는 스탈린이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 2
책을 보면 딱 영화 ‘빠삐용’이 생각난다.
독방 한번 갔다 오면
평생 치유 안 되는 병을 달고 나오는 것이나,
바퀴벌레 기어 다니는 그릇이라도
핥아먹는 것이나,
빵을 수프에 찍어서
싹싹 긁어먹는 것이나 모두 비슷하다.
그리고 슈호프는
빠비용과 같은 인물이라기 보다는,
빠삐용의 절친 ‘드가’와 같은 인물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감옥에서 나가게 될 텐데,
괜히 탈출 시도하려다
형량만 늘리는 짓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머리 써서
그 수용소 안에서만큼은
최대한의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살면서
크게 부족한 것 없이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던 것이라면
드가도 좋은 친구지만
빠삐용이 더 멋있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하지 못하는 행위라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멋있지도 않을 텐데 멋있게 보이는 거 봐선
나도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은가보다.
그렇게 형량 늘어나는 거 두려워하지 않고,
매 맞는 거 두려워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자유를 외치다가
마지막엔 바다로 뛰어드는 빠삐용.
슈호프에게는 빠삐용에게서 봤던
모습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이 책은 그런 무용담을 담은 소설이 아니라
사실을 고백한 소설이기에
현실에선 드가형 인간이 더욱 많은가 보다 했다.
무용담이나 전설은 그렇게 만들어지나 보다.
사실일 수도 있고 과장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런 무용담을 담은 전설 같은 얘기를
그렇게 좋아하거나
그런 이야기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그렇게 하고는 싶은데 하지 못하는 마음을
들썩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많은 남자들이 군대에 다녀온
이야기로 무용담을 꾸민다.
이것이 강제로 끌려갔다 온 것이긴 해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대단한 자유의 경험이었나보다.
군대라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몇 년 만에 자유를 맛본 그 경험이
마치 스스로가 빠삐용이 된 것처럼 느껴지나 보다.
대단한 극기의 경험을 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을 진짜 장착했는지
아닌지는 별개일 수 있다.
빠삐용은 한번 실패 후에도 죽는 날까지
자유를 위해 바다에 뛰어내렸다.
이것이 진정 자유를 장착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통의 무용담을 펼치는 사람들은
한때의 뿌듯한 자부심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 3
슈호프를 스탈린 독재체제의
희생양이라 생각해보면,
그렇게 쫄쫄 굶고
추위에 떨어가며 8년을 살았으면서도
오늘 하루가 행복했다는
그를 두고 뭐라 할 수 있을까.
아무도 그를 빠삐용 처럼
탈출하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빠삐용 친구 ‘드가’처럼
수용소 생활에 안주하며
살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런 슈호프가 수용소 8년차이다.
8년 내내 그런 모습으로
지내왔다는 것은 아니고,
누적된 경험에 의해 그 하루가 생겼다는 것이다.
단 하루의 일기이지만 그 하루는 8년 동안의
경험이 누적되어 나타난
보물 같은 하루 일 수도 있다.
그래서 행복했노라 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 비굴하고 어쩌고 해도
감옥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대단히 적응을 잘하는 수감자임에 틀림없다.
이걸 감옥이라는 틀만 벗겨내면
사회인으로서는 매우
성공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수용소처럼 매일을 비슷하게 사는 것도
역시 보통의 사회인들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가
나의 그동안의 연구와 노력의 결과로 인해
빵 한 조각이 아닌 목돈이 들어오고,
그 목돈으로 원하는 것을 사는 하루가 되었다면
슈호프의 이런 하루에서 오는
행복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하루는 그냥 하루가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고,
앞으로를 살아가기 위한
지표가 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슈호프도 지난 8년간 살아온 것에 대한
온갖 노하우로 이날 하루를
매우 행복하게 보냈고,
또 지내게 될 2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수용소이긴 하지만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에서의 10년 중
8년 차의 하루를 보고 있노라면
묵묵하게 잘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묵묵함과 성실함만으로는
뭔가 큰 것을 이룰 수 없구나 하는 것을
알 게 되는 것이 있다.
묵묵함의 끝에 묵묵함만 남는다면
좀 부족함이 남는다.
그러니 책을 통한 솔제니친의 현실보고를 통해
시선을 스탈린에게 돌려서 봐야하는 점도 있지만,
반대로 아직 현실이 그렇진 못하더라도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려보기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봤다.
수용소처럼 살아남기 힘든 삭막한 세상이라서
도태되거나 낙오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부하며 사는 것이 다일까 하는 점이다.
스탈린이 집어삼킨 수용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 안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얻을 수 없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이다.
그저 최대한 노하우를 체득하여
덜 힘들게 살 고 있을 뿐이다.
자유롭지 않는 이상에는 집 안에 있어도,
바다를 가고 해외를 가고 지구 어디에 있어도
스탈린이 관리 감독하는
수용소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자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
힘을 생각해보게 되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란
바로 이렇게 인간들이
자유에 무감각 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8년간의 노하우로 묵묵히 살아온
슈호프가 얻은 하루의 행복이
그렇게 뿌듯하거나
바람직하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꼭 스탈린의 악독함에 대한
반감만이 아니라
뭔가 나 자신이
크고 작은 수용소 안에 갇혀 살면서도
자유에 무뎌지는 면이 있어서 일 것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책을 통해
그렇게 수용자들의 하루를 보고 느끼며
당대의 정치적인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마지막에
슈호프가 느끼는 행복감을 통해
그런 시궁창 같은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행복이란 게 과연 자유가 없이도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보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내가 여태 자유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면
그건 지배당한 수용소에서 살며
자유에 무뎌져 있었다는 것일 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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